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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May 29. 2024

나의 쾌적한 지옥으로 돌아왔다

여행은 끝났고,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여행이 끝이 났다. 방콕에서 시작했던 발리와 길리를 거쳐 마지막으로 호치민 1박까지, 총 43박 44일이 되었다. 인천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와서 대충 정리하고 침대에 누우니,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여행을 다녀온 날들이 진짜 있었던 날들인지 실감이 안 난다는 생각이었다.


과거는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그러니 내 기억 속에만 있는 그 과거는 더 이상 사실인지 아닌지가 아무 의미가 없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내가 여행을 통해 뭔가 변화를 맞이할 것을 기대했다. 그런데 게으르게 침대에 누워있는 나는 너무나 똑같았다. 그대로 지난 44일이 내 인생에서 없었던 일이 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오타쿠적으로 표현하자면, 마치 모험이 끝나서 작품이 완결 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의 일부는 저쪽 다른 차원의 세상에 남아 있는데 나만 갑자기 현실로 튀어나온 것 같은 기분. 장기여행이 처음이었어서, 모두가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건지 궁금했다. 지난 44일이 나한테 무엇을 남기기라도 한 건지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아무튼, 이제 현실을 살아야 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정신과 의사 선생님을 만나는 일이었다. 어쨌든 나는 치료 목적의 요양 중이므로 경과를 보고해야 했다. 어쩌다 보니 여행 전날 방문한 병원을 귀국 다음날 바로 방문하게 되었다. 그렇게 선생님을 마주하고, 어떻게 지냈냐는 말에 긴 여행을 다녀왔다고 했다. 그러자 선생님이 바로 물어보셨다. “그래서, 뭘 느끼셨나요?” 아직 내 속에서 생각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뭘 느꼈을까, 내가 무슨 말을 가장 많이 했을까, 그렇게 빠르게 기억 속을 헤집다가 바로 내가 내뱉은 말은, “꼭 한국에 안 살아도 되겠다 싶어요.”였다.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은 확실히 평소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는 달랐다. 퇴사하고 프리다이버 강사를 도전하거나, 외국에 살고 있거나, 앞으로도 돈 버는 족족 여행 다닐 거라 말하는 사람들이었다. 처음 그들을 만났을 때의 나는 그들의 미래가 불안하게 느껴졌다. 나는 안정적으로 실패하지 않는 선택을 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해야 할 것을 해야 할 때에 했다. 앞으로의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적당히 결혼하고 저축하고 뭐 그렇게 살려니 했다. 나는 늘 남들 같은 삶을 살기를 바랐다. 튀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튀는 삶을 살았을 때, 내 삶을 바라보는 외부의 평가가 무서웠다. 남들이 사는 대로 살면 적어도 유독 실패하진 않을 수 있다. 동행 언니가 내 첫인상을 “대한민국의 엘리트” 같았다고 표현했다. 태어나서 그런 말은 또 처음 들었지만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다. 학창 시절에 공부 쫌 잘해서 명문대 가서 대기업에 취업한 나는 그야말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전형적인 대한민국 표준 엘리트일 것이다. 길리에서 맨발로 씻지도 않고 바닷물에 절어서 누워있으면서, 다 던지고 이대로 여기서 렌탈샵이나 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사랑하는 바다와 동물들과 음악이 있는 여기서. 그런데, 그럼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볼 것 같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여행을 다녀와서 내가 느낀 건, 세상에는 나처럼 살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거였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심지어 해외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현지인들까지도 입을 모아 말했다. 한국에서는 확실히 대부분이 선택하는 모범답안이 있는 것 같다고. 삶에는 정답이란 없는 건데 말이다. 그리고 그 모범답안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은 결과에 따라 어리석거나 신기하거나 대단하게 여겨지는 것 같다. 그게 너무 갑갑하게 느껴졌다. 휴직을 하기 전, 파트장님은 내가 대기업에 맞지 않는 사람인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그 말이 뭔가 자격미달이나 탈락과 같은 의미로 느껴졌었다. 그런데 여행을 하면서 생각해 보고 분석해 본 나는 단점도 장점도 굉장히 많은 사람이다. 내가 어떤 환경에서 도태된다고 해도 그건 내 문제가 아니다. 생물의 형질에는 우등함과 열등함을 따질 수 없다. 단지 주어진 환경에 얼마나 적합했는지, 그뿐이다. 나는 분명 어떤 부분에서는 굉장히 뛰어나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다. 내 가치를 알아주는 환경을 찾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한국에 돌아와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아 너무 쾌적하다…!”였다. 하필 마지막 며칠 동안 바퀴벌레를 너무 많이 본 탓에 얼른 집에 돌아오고 싶기도 했다. 여행 중에는 한국이 너무 숨 막힌다는 생각을 했지만, 막상 돌아오니 역시 한국이 가장 살기 편하다는 생각을 했다는 내게 의사 선생님이, “천국 같은 지옥에 돌아온 걸 환영합니다!”라고 하셨다 (전에도 느낀 거지만 이분 정신과의사로서의 자질이 좀 의심된다ㅋㅋㅋㅋㅋ이런 말 환자한테 해도 되는 건가!?). 그래서 나는 웃으면서 “쾌적한 지옥이죠.”하고 대꾸했다.


바로 그다음 날 온라인 회고모임에서 이런 생각들을 나누었다. 마침 내 주변에 원하는 것을 쫓아 삶의 궤적을 바꾸고, 해외까지도 간 사람들이 있다는 게 참 감사했다. 한 달 전 첫 번째 모임 당시에는 나는 그저 이분들이 신기하고 부러웠다. 그렇지만 나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었다. 한 달이 지나, 이번 두 번째 온라인 모임에서는 나 역시 보편적이지 않은 선택을 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나를 둘러싼 표면적인 것들을 배제하고 내가 본질적으로 지향하는 것들을 쫓으며 한국을 떠나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말하는 내게, 조원들은 다들 격려와 응원을 해주셨다. 한 번 그런 생각을 가진 이상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최대한 넓은 세상에서 많은 것을 경험해 보라고, 의외의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을 옳게 만들어보라고. 지금의 이 불안정한 시기에 이런 분들을 만나게 된 것도 다 하늘의 계시인 것만 같다. 정말 내가 한국을 떠나게 된다면 우리 조원분들은 내 인생을 바꾼 귀인이 되실 예정이시다. 물론, 내가 계속 반복되는 대화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건 내가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싶기 때문인 것을 안다. 하늘의 계시가 아니라, 내 마음이 좇는 방향이 명확해진다.


사실 모든 것에는 장단점이 있고, 그건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여행 중에 살고 싶다고 생각한 곳도 정말 현실이 되었을 때는 그 사회만의 고충이 있을 것이다. 가볍게 즐거운 순간만 즐기다 온 나에게는 뭐든 다 즐거워 보였겠지. 그리고 최대한 안정적이고 보수적이고 살아온 나한테는 용기도 결단력도 확신도 부족하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은, 어쨌든 삶의 방식도 환경도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넓어졌다. 이런 얘기를 들은 한 친구가 1년 뒤의 내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과연 내가 정말 의외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단지 더 넓은 세상을 알게 되었다는 것, 지금은 그거 하나로도 충분하다. 여행 다녀오길 참 잘한 것 같다.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든, 나의 이 쾌적한 지옥을 극복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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