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으로 시작해서 44일에 걸친 내 여행의 마지막 밤은 호치민에서 맞이하게 되었다. 돌아오는 비행기를 호치민 경유로 끊었기 때문이다. 원래 5시간 경유하는 거라 밖에 못 나가고 공항에 갇혀있어야 했지만, 비행기 일정을 미루면서 18시간 경유로 변경했다.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서였다.
호치민에 사는 한인들을 길리에서 만나게 된 것은 나의 노트북 덕분이었다. 길리에 입도한 다음날, 뭐 할지 찾아보려고 여행 카페를 보다가 마침 그날 올라온 지금 길리인 사람을 찾는 글 두 개를 발견했다. 하나는 투어 동행을 구하는 글이었고, 하나는 노트북 빌려줄 사람을 찾는 글이었다. 길리에서 딱히 할 게 없었던 나는 여행 중 사람을 굳이 안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 글 두 개에 다 연락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주 운명적인 날이었던 셈이다.
내가 선뜻 노트북을 빌려줘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그게 효율적인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크게 손해 보는 것 없이 상대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나는 가끔 게임하고 글 쓰려고 노트북을 가져온 거라 평소에는 거의 쓰지 않았다. 그들은 대학원 시험 때문에 노트북이 필요하다고 했다. 평소 대학원생에 대한 측은함이 깔려 있는 나로서는 여행까지 와서 시험을 봐야 하는 불쌍한 대학원생을 도와주고 싶었다. 그리고 왠지 나말고는 빌려줄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 나처럼 길리에 노트북을 가져왔고, 그런데 별로 안 쓰고, 시간이 많아서 귀찮음을 감내할 수 있으며, 모르는 사람을 믿고 빌려줄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주민등록증을 담보로 잡고 내어준 노트북은 꼬박 하루 만에 무사히 돌아왔다. 처음엔 사례금을 준다고 했지만 그냥 밥이나 한 끼 먹기로 했다. 원래라면 굳이 낯선 사람과 밥을 먹지 않았겠지만, 전날 투어 동행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덕분에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하여 흔쾌히 수락했다. 그렇게 그 두 사람을 만나서 저녁을 같이 먹었다. 어색할까 봐 걱정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간 게 무색하게, 그날 밤은 여행에서 손꼽히게 즐거운 날이 되었다. 우리는 바닷가에 앉아 별을 보면서 맥주를 마셨다. 그 순간이 꿈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면서, 우리가 오늘 처음 만난 사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일 때문에 호치민에 산다고 했다. 한국으로 돌아갈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다는 그들에게서 미래를 고민하는 사람으로서의 유대감이 느껴졌다. 그들이 바로 롬복으로 떠난 탓에 그날 이후로 또 만나지는 못했다. 언젠가 호치민이나 한국, 혹은 제3의 나라에서 만나자고 기약 없는 약속만 했다. 그들은 일상으로 돌아가고 나는 길리에 남아서 여행을 계속하면서 이따금씩 인스타로 안부만 주고받았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날은 생각보다 가까웠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는 호치민을 경유하는 비행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귀국 날짜를 정하고 그들에게 연락했다.
사실 좀 걱정이 되긴 했다. 나와 달리 그들은 여행지에서 한 번 만났을 뿐인 인연을 굳이 이어가고 싶어 하지 않으면 어쩌나. 호치민 오면 꼭 연락하라는 말이 빈말이었으면 어쩌나. 그렇지만 만나보기 전까지는 빈말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나 혼자 지레 짐작하고 실망하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나는 호치민을 들러야 하니까! 정 안되면 혼자 놀지 뭐! 그렇게 호치민에서 하루 묵을 숙소까지 예약했다.
발리를 떠나는 날, 예상치 못한 교통체증에 공항까지 30분 거리가 두 시간 넘게 걸린 나는 발리에서 호치민으로 가는 비행기를 놓쳐버렸다. 바로 다음 항공기를 예약했지만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훨씬 늦게 생겼다.지갑은 길리에서 잃어버렸고 베트남 유심은 사지 못했으니 완전한 거지꼴이었다. 그 친구들에게 오롯이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정말 민폐라는 생각에 너무 미안해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렇지만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져서 뒤늦게 약속장소에 도착한 나를 보자마자, 그들은 단지 반갑게 웃으며 맞아줄 뿐이었다. “소연아, 괜찮아? 오느라 정말 고생했어!” 기다리느라 짜증나거나 귀찮았을 법도 한데 그들은 오히려 나를 걱정해 줬다. 그 말을 들으니 그날의 스트레스와 피로가 사르르 녹았다.
고작 한 달 전에 한 번 만난 사이일 뿐인데 낯선 타국에서 아는 얼굴을 봐서인지 무척 반가웠다. 그들은 나의 호치민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날을 알차게 보내야 한다며 먹고 싶은 거 다 시키라고 했다. 인도네시아는 음식이 맛이 없어서 힘들었던 터라 오랜만에 먹는 베트남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감격스러웠다. 마치 호치민 1일 속성 투어라도 되는 양 랜드마크들을 구경하고 술도 잔뜩 마셨다. 처음 만난 그날처럼 취기를 느끼며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 모든 비용은 그 친구들이 냈다. 늦은 것도 미안하고, 다음날 일찍 출근해야 하는데도 나랑 놀아주는 게 고마워서 내가 사겠다고 했으나 지갑이 없으니 별수가 없었다. 돈을 보내주겠다는 말에도 그들은 극구 거절하며 내가 호치민까지 왔으니 자기들이 사는 게 맞는 거라고 했다. 그냥 나는 호치민을 들러야 해서 들른 것뿐인데….
사실 나는 이해타산적이라 타인의 호의를 잘 받지 못한다. 무언가를 받았으면 꼭 그만큼 되돌려줘야 마음이 편하다. 내 계산으로는 내가 빌려준 노트북에 대한 보답은 길리에서 밥 한 끼 얻어먹은 걸로 끝났다. 그런데 호치민에서까지 이런 극진한 대접을 받는 게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불편했다. 나한테 어떻게 이렇게 잘해줄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가 또 언제 만날지, 다시 만나긴 할지, 내가 이 은혜를 갚을 수 있을지 확신도 없는데.
예전에 회식자리에서 부서동료가 나한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가끔 힘들어하는 내 일을 도와주고 싶어도 내가 부담스러워하는 게 보여서 못 도와줬다고. 그래서 나랑 더 가까워지고 싶은데 벽을 느낀다고. 그 말이 고맙고 감동이었지만 그 벽을 어떻게 허물어야 할지 몰라서 나는 멋쩍은 웃음만 지었었다.
내가 가끔 인간관계에 굉장히 서툴다고 느낄 때가 있는데, 바로 이런 경우다. 누군가 잘해주면 그냥 고맙게 받아들이고 다음에 또 갚으면 되는 건데, 그게 잘 안된다. 항상 그렇게 나는 타인에게 곁을 내어주는 일을 어려워했다. 그렇지만, 사실 인간관계는 원래 수지타산이 안 맞는 게 아닐까? 서로 남은 것 없이 깔끔하게 계산하는 것보다 조금씩 빚을 지고, 갚아가면서 인연이 이어지는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극구 사양하는 것보다 그냥 감사히 받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대신에 다음에는 꼭 내가 밥을 사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서로 돌아서기까지 오래 손을 흔들었다. 오늘 진 빚을 갚아야 하니까, 우리는 다음에 꼭 다시 만나야 해.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친구여야 해. 그렇게 마음 속으로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