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리에서 나는한국인 동행들을 몇 명 만났다. 우리는 빠르게 친해졌다. 여행이라는 상황도 있겠지만, 대개 발리로 장기여행을 온 사람들은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하여 잠깐 쉬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서로 말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게 있었다.
그중 한 명이 Y언니였다. 길리 트라왕안을 떠나기 직전에 만난 Y언니는 예쁘고 까칠해 보였던 인상과는 달리 아주 소탈하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여러 명이 모인 자리에서도 유독 나와 잘 맞는 사람인게 느껴졌다. 우리는 길리 아이르로 이동하는 일정마저 겹친 덕분에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나는 그동안 안 맞는 일을 억지로 하면서도 사람들이 좋아서 버텨 왔다. 그러다 너무 지친 나머지 사람들에게 쓸 에너지마저 바닥나서 발리로 도망왔다.잔뜩 날이 서서 예민해진 내가 사람들을 찌를까봐 두려웠다. 반면 언니는 사람 대하는 일을 하면서 무례한 사람들 때문에 상처 받았다. 발리로 도망쳐온 뒤에야 본인이 사람을 싫어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이곳에서 나는 여유를 찾았고 언니는 위로를 받았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결핍을 채우고 있었다.
길리 트라왕안에 비해 더욱 한적하고 조용한 길리 아이르에서의 며칠이 평화롭게 지나갔다. 언니는 길리 아이르를 떠나서 발리 우붓으로, 나는 프리다이빙 자격증 재시험을 보기 위해 길리 트라왕안에 들렀다가 꾸따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우리의 마지막날, 저녁을 같이 먹기 위해 만났다. 길거리에서 파는 사테를 먹으면서 해변가를 걸었다. 여행을 마무리하는 기분에 젖은 내가 물었다.
언니는 여기서 지내는 동안 뭐가 제일 좋았어요?
그 말에 언니는 자기가 가장 감사했던 순간을 세 가지 기록해 두었다며 핸드폰 메모장을 켰다. 그러면서 하나씩 읊어 주었다.
“첫째, 스쿠버다이빙할 때, 세상 한가운데에 둘러싸인 그 기분이 너무 좋았어. 그래서 다이빙이 좋아.”
나도 익히 아는 기분이었다. 내가 프리다이빙을 처음 접했을 때 느꼈던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압도당하는 기분. 나는 한국에서 사실 자연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등산을 가고 별을 보러 다니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발리에서 노을을 보고,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보면서, 내가 거대한 세상의 작은 일부로 녹아드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그간 고민하던 것들이 다 아스라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자연을 좋아하는구나 싶었다.
“둘째, 길리에서, 특히 길리 아이르에서 해변가 아무 데나 누워 있을 수 있던 그 자유로움이 좋았어.”
길리 트라왕안도 충분히 한적하고 여유롭다고 생각했지만, 길리 아이르에 비하면 확실히 인파가 많은 편이었다. 그리고 사실 길리 트라왕안에는 술집과 클럽이 많아서 밤에는 광란의 파티가 벌어진다. 물론 술을 안 좋아하는 나에게는 단지 거북이섬일 뿐이었지만. 언니는 길리 아이르에서는 인적 드문 해변가가 많아서 하루종일 누워서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그게 너무 좋았다고 했다. 화장도 치장도 필요 없었다. 하루종일 바닷물에 절어 지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셋째, 발리 사람들은 항상 웃고 있어. 늘 기분이 좋아 보여서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아져.”
나도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내가 발리를 다시 오고 싶었던 이유기도 했다. 6년 전 처음 발리에 왔던 때에도 발리의 사람들은 항상 친절하게 웃으며 나를 대해주었다. 그들의 표정에서는 피곤과 짜증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언니는 사람들이 자꾸 말 거는 게 처음에는 좀 성가셨는데, 내게서 그게 인도네시아의 인사 문화라는 걸 들은 뒤로는 그것마저도 감사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나의 말이 언니에게 그런 영향을 미쳤다니 뿌듯했다.
얘기를 나누다보니 나도 떠오르는 게 있었다. 내가 이곳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언니, 저는 ‘사마사마’가 오래오래 생각날 것 같아요.
인도네시아어로 ‘감사합니다’는 ‘뜨리마 까시’이다. '뜨리마 까시', 하면서 감사의 인사를 건네면 으레 따라붙는 게 있었다. 바로 “사마사마(sama sama)”, 인도네시아어로 ‘천만에요’라는 의미다.
발리에서 지내면서 정말 신기했던 게, 그 어떤 순간에도 ‘뜨리마 까시’를 건네면‘사마사마’가 따라붙었다. 그러면서도 그 '사마사마'는 결코 형식적이지 않았다. 두 손을 모으고, 눈을 마주치면서, 찬찬히 노래하듯 경쾌한 음률로, ‘사마사마’. 음계로 치면 아마 도-미-파-미 정도 될까.그 말을 내뱉는 그들은 마치 나의 감사하다는 표현에 진심으로 기분이 좋아진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미소를 주고 받으며 돌아서 나오는 매순간, 내 입가에는 미소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그게 나를 얼마나 기분 좋게 만들었던가. 내 말에 언니도 박수를 치며 공감했다.
“맞아, 사마사마.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너무 기분이 좋아졌었어. 한국에서는 그냥 형식적으로대충 상대방이 '감사합니다' 하면 반사적으로 내뱉고 마는 ‘감사합니다’였는데, 여기서는 그 말 하나하나에 진심으로 존중받는 것 같았어. 내가 정말 소중한 사람으로 대우 받는 기분이었어. 나도, 돌아가면 그게 정말 그리울 것 같아….”
언니의 목소리가 울컥하는 게 느껴졌다. 나도 목이 메었다.
누군가 나에게 발리의 뭐가 그리 좋냐고 물어보면 나는 잠시 고민하게 된다. 발리 본섬은 사실 교통체증도 심하고, 사람도 많고, 다른 동남아 휴양지에 비해 비싸다. 길리도 사람에 따라서 말똥냄새나는 시골 섬에 불과할 수도 있다. 혹자는 그 지겨운 작은 섬에서 대체 어떻게 20여 일을 있었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그러게. 뭐가 그리 좋았을까. 구체적으로 형언할 수 없고 직접 있어보면 체감하게 되는 그것은 아마 분위기인 것 같다. 날씨가 화창해서일까, 사람들의 생활방식이 한국보다 단순해서일까. 길리를 떠올리면 여유로운 거북이의 몸짓과 바닷가에서 기타치는 사람들이 그려진다. 나도 모르게 물들게 되는 그 여유로움에 다시금 또 이곳을 그리워하게 된다.
그날 그 밤바다를 거닐었을 때의 기분이 생생하다.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고 싶은 기분이었다. 끝이 나는 게 무서웠다. 한국에 돌아가는 것도, 지금 이 순간 깊은 공감에 젖어 있는 우리 둘의 긴밀한 유대감도 각자의 현실을 마주하면 끊어질 게 분명했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순간들 앞에서 다만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많이 기억하고 새겨두는 것뿐이었다. 언젠가 다시 사람에 지칠 때, ‘사마사마’를 말하며 마주쳐오던 눈동자를 떠올릴 수 있게. 사람으로 상처받고 사람으로 위로받는 그런 게 인생이라고, 분명 또 위로받을 순간들이 다가올 거라는 믿음을 잃지 않기 위해.
한국에서 다시 만나면 우리는 '사마사마'를 주고 받기로 했다. 우리가 사랑했던 그 경쾌한 멜로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