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발리 여행의 마지막 장소는 처음 시작했던 곳, 꾸따였다. 발리에 처음 도착한 뒤 어딜 가겠다는 생각 없이 그냥 서핑 하나만 보고 공항과 가까운 꾸따에서 일주일을 묵었다. 그리고 그 뒤로 우붓, 길리 트라왕안, 길리 아이르를 거쳐 다시 출국을 앞두고 꾸따로 돌아온 것이다.
꾸따에 돌아가면 서핑을 꼭 다시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길리에서 스노클링과 프리다이빙을 하면서 나는 서핑을 별로 좋아하지도, 잘하지도 못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하지 말까 싶기도 했다. 그렇지만 마지막으로 서핑을 꼭 한 번 더 하고 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지난번 꾸따에서 내 서핑선생님, 로이와 그 가족들의 친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로이에게 한 번 더 고객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꾸따에 도착했을 때 내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길리를 떠나기 직전에 고막이 터져도 된다는 각오로 무리해서 프리다이빙을 하다가 몸살에 코피까지 났다. 꾸따로 가는 6시간 동안 거의 끙끙 앓았다. 그렇지만 이제 또 꾸따의 석양을 볼 수 있는 날이 며칠 안 남았기 때문에 꾸역꾸역 해변으로 기어나갔다. 그리고 로이를 만나서 인사하고 저녁을 같이 먹게 되었다.
한 달 만에 만난 로이네 가족들 중에는 내가 모르는 얼굴이 있었다.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애였는데, 누구냐고 물어봤더니 발리에 온 지 이제 4일 정도 된 로이네 동생이라고 했다. 그래서 영어도 한국어도 못한다는 그 친구, 아리는 원래도 조용한 것 같은데 나 때문에 우리가 영어로 대화한 탓에 더더욱 입을 열지 못했다. 나는 그게 무척 미안하고 신경이 쓰였다. 그러다 로이한테, 서핑을 한 번 더 하고 싶긴 한데 몸살이 나서 두 시간은 힘들 것 같고, 한 시간만 레슨 받을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로이가 제안했다. “너 혹시 아리한테 수업 들어볼래?” 엥?
로이의 제안은 이랬다. 아리는 이제 막 서핑을 배우고 있고, 영어도 한국어도 못해서 누굴 가르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런데 아리도 여기서 서핑 강습을 하면서 돈을 벌기 위해서 온 거니까 경험을 쌓는 게 필요하다. 그렇지만 아리 같은 신참한테 고객을 맡기긴 힘들다. 그러니, 혹시 아리의 첫 번째 고객이 되어주지 않겠냐는 거였다. 그래서 나는 번역기로 ‘혹시 나를 실험용 쥐로 쓰겠다는 거야?’라고 물어보았다가, 어떻게 그렇게 표현할 수 있냐고 타박을 맞았다. 일단 생각해 보겠다고 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아마 로이는 몰랐을 거다. 그 제안이 얼마나 나한테 솔깃했는지! 그다음 날 아침에 나는 몸살 기운에 제대로 앓았지만, 늦은 오후가 되자 좀 상태가 괜찮아졌다. 내일 점심 비행기로 발리를 떠나기 때문에 서핑 레슨을 받으려면 오늘이 마지막 기회였다. 만약 로이한테 레슨 받는 거였으면 그냥 취소했을 거였다. 이미 받아봤으니까. 그런데 아리의 첫 번째 고객이 되는 건 이번이 유일한 기회였다. 사실 나는 서핑실력을 향상시키는 것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내가 서핑 레슨을 받으려던 건 그냥 재미, 체험, 추억, 그리고 로이네 매출 올려주기.. 정도를 위한 거였다. 그런 내게 재밌고 추억이 되면서 아리에게 도움도 되는 이번 제안은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누군가의 인생에서 첫 번째가 되기란 쉽지 않다. 아리의 서핑 강사 인생을 내가 열어줄 수 있다면 참 It's my pleasure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꾸역꾸역 또 해변으로 나갔다.
그렇게 우리의 3인 레슨이 시작되었다. 로이가 아리의 옆에 붙어있으면서 나를 가르치는 방법들을 설명해 주고 한 번씩 보드를 밀어주도록 시켰다. 서핑 레슨은 강사가 보드를 밀어주고, 타이밍에 맞게 외치면, 내가 그에 맞춰서 일어나는 일종의 팀플레이라는 기분이 든다. 혹은 아바타 조종? 아리한테는 그 모든 게 다 처음이었다. “엎드려”,“준비”, “일어나!” 등의 처음 배운 한국말에 맞춰서 내가 움직이니까 무척 재밌었나 보다. 잔뜩 신이 난 게 느껴졌고, 나도 덩달아 신이 나서 아리가 “엎드려!”하면 나도 “엎드려!”하면서 장단을 맞춰줬다. 그리고 이상하게 그날 내가 서핑을 되게 잘했다. 거의 밀어주는 족족 해변 끝까지 잘 탔다. 그럼 또 서로 엄지를 치켜세우고 하이파이브를 했다. 셋 다 잔뜩 들떴다. 로이가 나한테 말했다.
이게 내가 원했던 거야. 우리가 다 같이 행복한 경험을 공유하는 것.
그렇게 아름답기로 유명한 꾸따의 석양을 배경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것은 내가 발리에서 보는 마지막 석양이었다. 내 여행의 마무리로 정말 완벽한 경험을 한 것 같아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로이네 가족들은 나보고 정말 착한 사람이라고 해줬다. 아니 뭐, 내 재미와 의미를 위한 행동이었고 내가 딱히 손해 본 것도 없는데 좋은 사람으로 봐줘서 고마울 따름이었다.
길리 여행을 시작하면서 만난 가이드 해리가 자기 인생의 모토는 ‘카르마’라고 했다. 남을 도우면 그 덕이 자신에게 나중에 돌아온다며, 그래서 자기는 남을 돕는 걸 기껍게 여긴다고 했다. 나는 사실 기껍게 남을 돕는 성향의 사람은 아니고, 내가 큰 손해보지 않는 정도에서만 타인을 위하는 편이다. 기가 막히게 내가 손해 보는 일은 별로 안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일처럼 고마워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얼떨떨하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누군가를 도우면 그 사람의 반응을 보고 바로 이렇게 행복해지는 것도 카르마 아닐까? 결국 나의 이타심은 다시 나에게로 향하게 된다. 남을 기분 좋게 만들 때마다 나라는 사람이 더 의미를 찾는 것 같다. 역시 나는 타인의 삶에 영향 미치고 타인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구나 다시금 깨닫는다.나는 앞으로도 그렇게 이타적으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