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이 Jun 22. 2023

소설을 사랑하는 이유

내가 소설가를 꿈꾸는 이유

요즘 책을 아주 열심히 읽고 있다. 지난 여름부터 한 달에 두세 권씩은 읽었던 듯 한데, 성인이 된 이래로 이렇게 책을 열심히 읽었던 시기가 있었던가 싶다. 당연히 완전한 자의는 아니고, 독서모임을 아주 열심히 하게 된 덕분이다.


독서모임을 시작하면서 매번 책을 읽고 나면 그 책에 대해 나름의 별점을 매기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고 난 뒤 함께 토론 한 사람들에게도 각자의 별점을 물어본다. 그 점수는 나와 비슷할 때도 있고 아예 다를 때도 있다. 가령, 가장 최근에 읽은 <데미안>의 경우 다들 대체로 4점 정도의 높은 점수를 주었지만 나는 2점을 주었다. 반면 연초에 읽은 <어떤 양형 이유>의 경우 나는 거의 만점을 주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3점도 아깝다며 혹평했다. 그럼 또 각자 어떤 까닭으로 별점을 매겼는지 얘기 나누는 재미가 있다.


처음 별점을 매기기 시작했을 때는 그 기준이 고민이었다. 모든 판단을 대충 감으로 하곤 하는 나는 별점 역시 책을 읽고 난 직후의 감정에 따라 매겼다. 책을 덮고 난 직후의 벅차오르는 정도가 내게 좋은 책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매겨진 점수는 사실 그 책이 책으로서 가져야 할 덕목들을 잘 충족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지 내게 얼마나 큰 감정적 울림을 주었는지의 의미 밖에 되지 않는다. 책이란 목적이 다양한 매체인데, 아예 재미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책들은 내게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한다. 물론 내 주관적 점수이므로 그래도 상관없지만, 나는 객관적으로 훌륭한 책의 기준을 찾고 싶었다.


나름 구체적인 기준을 가지게 된 것은 <노인과 바다> 독서모임 때였다. 이 책은 누구나 제목은 알고 있지만 내가 절대 혼자서는 읽지 않을 고전문학이었다.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늦은 밤 꾸역꾸역 책을 읽어내고는 가장 먼저 떠오른 감상은 ‘도대체 이게 왜 명작인가?’하는 의문이었다. 거대한 상어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한 끝에 결국 낚게 된다는 플롯은 너무 단순해서 재미가 없었다. 대체 내가 모임에 나가서 할 얘기가 있을까, 참석 버튼을 누른 걸 후회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으로 갔던 모임에서는 이 책이 담고 있는 상징에 대해 저마다 해석을 제시하며 풍부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 책이 쓰인 배경이 세계 대전 때였다는 미처 몰랐던 배경지식도 알게 되었다. 그제야 이 책이 절대 굴하지 않는 인간 의지를 강조한 배경을 알 수 있었다.


그 날 독서모임의 마지막 질문은 “이 책은 명작인가?”였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이 명작이라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목적을 가진 모든 것들은 목적을 충실히 달성하는 게 최우선이다. 이 책은 꺾이지 않는 노인의 의지를 강조하여 내 평소 삶의 태도를 돌아보게 하였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노력하면 할 수 있긴 할 거라는 느낌이 들었고, 나는 이토록 간절히 바라고 노력했던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주제 전달 다음으로 중요한 게 소설이라는 형식적 특성의 훌륭함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책은 마치 직접 옆에서 낚시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듯한 생생한 묘사가 뛰어난 작품이라고 느껴졌다. 그리고 각종 상징과 비유를 해석해 볼 여지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이 책이 잘 써진 책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다만 재미가 없었고 맹목적인 의지를 강조하는 주제의식에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에 개인적인 별점은 3점에 불과했다.


그 후로도 나는 잘 쓰인 책과 내 취향에 맞는 책을 구분하여 생각하며 평점을 매기고 있다. 혼자서는 오직 소설 밖에 읽지 않아서 독서모임에 가입했음에도 계속 소설만 골라서 읽게 된다. 하반기 들어서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작별인사>,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파친코>, <멋진 신세계>, <모순>, <데미안>을 차례대로 읽었고, 곧 예전에 한 번 읽었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시 읽을 예정이다.


책은 읽을 때마다 감상이 크게 바뀌기도 한다. 최근 읽은 작품 중 가장 완벽하다고 느낀 작품은 양귀자의 <모순>이다. 직장 동료가 인생책이라고 추천해 줘서 몇 달 전에 한 번 읽었던 책인데, 그때는 별 감흥이 없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결말부가 상응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소화시키기 못한 채로 남은 책이었기에, 이번에 독서모임 도서로 선정되자 반드시 참석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참석 버튼을 누르고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번에 다시 읽을 때는 기본적인 내용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이 작품의 문장 하나하나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내용을 따라가기에 급급하기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인 세밀한 심리 표현을 깊게 곱씹었다. 그렇게 끝 페이지에 이르러서 결말부의 서술을 읽자 책을 읽는 내내 가장 못마땅했던 요소가 그동안의 전개를 뒤집는 결말로 해소되었음을 깨달았다. 아주 완벽한 결말이었다. 앞서 내가 세운 기준으로 평가해 보자면 이 작품은 전하고자 하는 주제가 너무 좋았고, 전달도 잘 되었으며, 소설적 장치도 뛰어났다. 이 책을 읽고, 본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토록 풍부한 울림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소설이라는 장르와 소설가라는 직업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책은 언제 읽는지에 따라 와닿는 정도가 달라지기도 한다.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를 읽었을 때, 이러한 소설가에 대한 선망을 가장 크게 느꼈던 것 같다. 이 책은 코로나에 걸려서 격리하던 중에 읽었다. 나는 그동안 내가 사람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사회에서 부대껴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도 안 만나고 집에 갇혀 지내는 일주일이 너무 평온했다. 가고 싶었던 약속들을 못 가는 것이 속상한 한편, 가지 못하는 사유가 생겼다는 게 홀가분했다. 나는 기꺼이 스스로를 소모해 왔지만, 역시 내게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은 큰 에너지를 쏟는 일이었다. 그렇게 내가 추구해 온 삶의 방식에 회의감이 들었다.


그때 읽은 이 책에는 각자의 삶을 살아가다 지친 사람들이 나왔다. 진정 본인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 보편적인 삶을 사는 역할극을 하다가 튕겨져 나온 사람들이다. 좋아하는 책들 속에서 묻혀 지내다가, 가끔 이벤트를 열어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주인공의 서점 주인이라는 업이 나는 못 견디게 부러웠다. 하고 싶은 게 없으니 회사를 다니는 거라고 얘기하고 다녔었는데, 내가 미처 구체화시키지 못했던 내 이상적인 삶의 모습이 바로 그런 삶이었다. 그래서 격리가 풀린 이후 한동안 갑자기 뒤늦게 방황했다. 회사에 다니는 게 끔찍하게 싫었다. 지금 이 시대에 그런 동네 독립서점이 잘 될 수 있겠냐는 , 주인공은 건물주라서 가능하다는 , 애써 현실을 직시하려고 애쓰며 판타지에서 간신히 헤어 나왔다. 그때 참석한 독서모임에서 만약 이 책을 읽고 내가 정말 퇴사했으면 인생책이 될 수 있었을 거라는 농담을 했었다. 퇴사는 당연히 못했지만, 그 책이 내 마음을 헤집어놓았던 건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그 책을 쓴 작가가 너무 부러웠다. 이렇게 누군가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는 책을 쓰다니.


좋은 책이란 무엇인가. 이 책의 주인공은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개인의 입장에선 재미있게 읽은 책을 좋은 책이라 해도 충분하지만, 남에게 책을 추천해야 하는 서점 주인은 그 이상을 고민해야 했다. 그리고는 ‘삶을 이해한 작가가 쓴 책. 작가의 깊은 이해가 독자의 마음을 건드린다면, 그 건드림이 독자가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면, 그게 좋은 책 아닐까.’라고 답을 내린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게도 떠오르는 책이 있다. <데미안>을 읽고 만난 자리에서 ‘데미안’이 주인공에게는 세상의 확장의 시작이었듯, 나의 인생에서 크게 영향 미친 사람이나 사건이 있냐는 질문을 나누었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불현듯 이제는 읽은 지 10년이 훨씬 넘은 옛 친구가 떠올랐다. 바로 양산형 판타지 소설이 쏟아지던 그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 <드래곤라자>이다.


나는 <드래곤라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나와 베프가 될 수 있다는 말을 종종 하고 다닐 정도로 이 작품을 좋아했다. 사실 내용 자체는 이제 어렴풋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고, 지금 보기에는 문체도 많이 유치한 편이다. 그래서 다시 읽을 생각이 굴뚝같다가도 오히려 다시 보면 실망할까봐 망설이게 되는, 어쩌면 사춘기 중학생이었기 때문에 재밌게 읽었던 것일 수도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이 책이 내게 ‘데미안’으로 꼽힐 정도로 독보적인 의미로 남은 이유는 이 책의 주제가 그대로 내 가장 깊은 가치관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나는 단수가 아니다’, 즉 나라는 존재는 나를 둘러싼 사람들 내면에 기억된 ‘나’들의 총합이라는 게 이 책의 주제였다. 한창 한 사람의 개인으로 자리 잡아가던 시기에 그 가르침이 머릿속에 깊게 박혔다. 바로 개개인을 다면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신중히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내 가치관의 시작점이다.


만약 내가 이렇게 누군가의 인생에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얼마나 보람될까. 내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내가 그랬듯이 깊숙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벅찰까. 요즘 나는 소설 한 문장 한 문장을 풍부하게 느끼며 읽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쓸 내 소설이 닮았으면 하는 작품을 만나면 부러움에 몸서리친다.


소설은 은근하다. 소설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의식 속에 효과적으로 풀어내기 위한 대장정이다. 주제의식은 소설 속에서 조성된 상황에 우리가 감정적으로 몰입한 뒤에야 서서히 묻어난다. 그렇게 의식 깊은 곳에 스며든 메시지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드문드문 생각나곤 한다. 그 메시지들로 내 삶이 좀 더 풍부해지고, 나는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르침을 얻는다고 믿는다. 언젠가 내가 쓰는 소설도 그런 글이었으면 좋겠다.



- 2022년 12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