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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졸린닥 김훈 May 18. 2022

<화사한 그녀>단편

사람이 살다보면 그냥 슬퍼할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는 그냥 속절없이 울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슬픔이란 것이 경중이 없습니다. 어떤 때는 작은 일에도 큰 슬픔이 밀려와 그동안의 작은 일들을 자극하고 그 자극으로 더 슬퍼질 수도 있고 어떤 때는 거대한 슬픔이 밀려옴에도 눈물 하나 없이 그냥 멍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그녀가 떠났을 때 그러니까.. 잠시 어디론가 가버린 게 아니라..


... 그게 아니라...


네..

그녀는 참 속절없이 스스로를 던져버렸습니다. 내가 그렇게 사랑한다고 했는데 그녀는 '고마워'라는 말을 항상 하고는 그렇게 떠나버렸습니다. 


전 그녀의 고통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녀의 죽음 앞에서 어떻게 슬퍼해야 할지 참 망설였습니다. 왜 그녀는 화창한 봄날 내가 그렇게 너를 사랑함으로 나의 사랑을 항상 알아줘 그렇게 말했는데...


그녀는 또한 그렇게 해맑게 '알아... 나도 정말 너를 사랑해'라고 말해주었는데.. 그 말을 허공에 날리고 삶을 마무리했습니다. 


전 정말 그때 망설였습니다.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떨리기도 하고 눈물이 펑펑 나며 통곡을 해야 하는데 전혀 아무런 반응을 할 수 없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저에게 위로와 안타까움을 전하며 제 앞에 고개를 숙여주고 손을 잡아 수많은 짧은 단어를 내밀며 위로해 주었습니다.


네..


그녀와 저는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그런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도 우리 둘을 의심하지 않았으며 반드시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갈 그런 사람들로 봐왔습니다. 


..


..

정말 그렇게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한참 일하고 있던 시간이었습니다. 

달그락거리는 기계음에도 저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특별한 재능이나 돈이 없었기에 성실함이라는 무기로 이 세상을 살아가기로 전 다짐을 했습니다. 다들 말하듯이 특별한 능력은 없지만 이 나라에서 성실하게만 일한다면 먹고사는 것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그런 말을 기도문처럼 외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실천을 했습니다. 저는 참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주변 모든 분들이 그런 저에게 찬사를 보내주셨으며, 그런 사람들 중에 그녀가 있었고 우리는 친해졌고 절대빈곤이 아닌 모자람을 사랑이라는 것으로 그리고 함께라는 것으로 채워나가고 있었습니다. 정말 희망이라는 것이 있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믿음이었죠..

믿음.


그런데.. 네.. 그런데..

뭐라 말을 할까요..


그런데.. 그녀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화사한 날.. 어쩌면 우리 둘은 그간의 노고를 통해 만들어온 약간의 돈을 가지고 결혼이라는 것을 하며, 아이도 가지고 가정을 꾸려 양가 부모님의 축복과 주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살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 하아... 어쩔까요.


그녀는 봄날 너무나 좋은 날이라 다른 약속은 절대 하지 않고 오로지 그녀와의 만남을 위해 준비하고 약속한 날 그녀는 약속 장소의 가장 높은 곳에서 '낙화'해 버렸습니다.  제가 약속시간에 그녀를 보고 너무나 반갑게 뛰어가고 있었는데 그녀도 저를 향해 허공에서 뛰었습니다.


그다음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의 시신 수습도 제가 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사이랜 소리 그리고 제복입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왔다갔다하고 저는 구급차에 그녀와 함께 실려 병원으로 행했고.. 그리고 시간이 좀 더 흐르자 하얀옷을 입은 남자가 그녀의 부고를 전했습니다. 그리고는 주변은 울음과 통곡이 가득했습니다. 


그녀의 부모님도 저의 부모님도 그리고 지인들도 모두들 결혼식 합창가와 같은 그런 소리의 울음과 통곡으로 병원을 가득 채웠습니다 


저는 그녀의 영정 앞에서도 울지를 못했습니다.

내 믿음의 그녀가.. 내 기도문 같던 그녀가.. 내 앞에서 찬연하게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장례식을 치르고 그녀의 부모님은 제 손을 몇 번을 꼭 잡고, 안아주고, 눈물을 흘려주고 그리고 펑펑 울며 통곡도 하고 그러시더니 결국 사라지셨습니다. 저의 부모님도 아무 말을 이어가지 못한 체 울기만 하다 역시 자리를 떠나셨습니다.


저는 지금 그녀랑 살기로 했던 작은 집에 혼자 이사를 와 있습니다.

둘이 살기로 하고 열심히 작은 집을 마련했는데.. 

수많은 기계소리와 시간들을 투자해서 마련한 집인데.. 저는 이 집을 마련하기 위해 스무 살부터 십오 년을 공장 기계 앞에서 일을 했습니다. 지금은 그 기계를 통해 가장 잘 제품을 만드는 숙련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150만원에서 시작한 월급은 지금은 2배가 좀 더 넘는 그런 사람이 되었고 야간작업까지하면 400에서 500만 원의 월급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절대 나쁘지 않습니다.


뭐.. 그런 과정에서 10개이던 손가락은 8개가 되기도 했지만..  상관없었습니다. 

네.. 처음 손가락이 물렸을 때는 정말 아팠습니다. 정말 정말... 급하게 잘려나간 손가락을 들고 공장에서 병원으로 갔고 다행히 수술이 잘되어 잘려나간 손가락을 온전하게 가질 수 있었습니다. 아쉽다면 그런 사고를 몇 차례 격자 더 이상 접합 수술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0개이던 손가락은 지금의 8개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그녀는 나의 손가락을 사랑해주었고 나의 통증을 이해해 주었습니다. 

신기한 게 지금도 잘려나간 손가락이 아픕니다. 가렵기도 하고..


사랑하는 그녀도 참 열심히 일했던 사람입니다. 저보다는 월급이 적은 사람이었지만 적은 월급에도 그녀 역시 성실했습니다. 야간 잔업을 하면 그래도 300만원 이상의 돈을 받았습니다. 다만 아쉽다면 피부가 좀 안 좋았습니다. 뭐 어쩔 수 없죠.. 플라스틱에 화학물질을 코팅하는 곳이기에 오래 일하다 보면 그런 일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저희는 그런 게 별로 상관이 없었습니다. 

어찌하건 두 사람의 성실함으로 우리는 작은 집을 우리 이름으로 가질 수 있었으며, 그냥 행복하기만 하면 되니까요..


겨우 그 정도인데.. 젠장.. 


다만, 그녀의 죽음으로 저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다니던 공장의 사장이라는 사람이 생각 밖의 돈을 조문으로 쥐어주고 어깨를 두드리며 웃으며 갔습니다. 그리고 그 외 그 공장 남자들이 와서 돈을 쥐어주었습니다. 보험회사에서도 돈을 쥐어주더군요.. 우리는 서로를 위해 보험을 들었습니다. 미래는 좀 더 행복하자고 말입니다.


멍합니다. 지옥 같은 이 현실이..

그녀에게 우리 참으면서 일하자고 말했던 제 혀가 증오스럽기도 하고

그녀를 저 높은 곳에서 제가 밀어버린 것 같아 저주스럽기도 합니다.


네.. 저는 그녀와 행복해지고 싶었습니다. 

비록 별다른 재능이나 가진 배경은 없지만 그냥 성실하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충분해질 수 있다는 말을 믿으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저와 비슷한 그녀를 만나 저는 행복해질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군요..

저는 눈물이 나지 않습니다.

저를 증오하니까요.


증오합니다. 그들도..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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