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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주 Aug 11. 2020

#03 “사랑하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사실은 사랑하는 사이 #03

연재 중이던 소설이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2021.1.15)

<하는, 사랑> 출간을 알립니다. 

하는, 사랑




:: 연재소설입니다. 순서를 확인해주세요. ::

:: 19세 미만 청소년에게 부적절한 내용이 있습니다. ::




#03


부부는 참 오묘하고 이상한 관계다. 끝 간데없는 사랑의 마음도 순식간에 싸늘하게 말라붙을 수 있는 관계. 

가장 친밀했던 사람이 생판 모르는 남보다도 어색해지고 불편해진다. 서로를 정신없이 핥으며 하나가 되던 사이가 작은 티끌만으로도 균열이 생기고 서로를 투명인간처럼 대하는 일도 벌어진다. 


고작 몇 마디의 말에 마음의 문을 꼭 닫아버리고, 그 닫힌 문이 다시 열리지 않는 일도 있다. 어느 순간 불쑥, 대비할 겨를도 없이 나도 상대방도 차가운 얼음덩어리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결혼 15년 차인 나는 잘 안다.


결혼 생활이란 깨지기 쉬운 얇고 섬세한 유리 조각품을 끌어안고 거친 산길을 끝없이 걷는 것과도 같다. 바람만 세게 불어도 금이 가고, 재채기만 해도 귀퉁이가 부서진다. 떨어뜨려서 아예 산산조각이 나지 않고서야 어떻게든 그것을 안아 들고 하염없이 걷는 것이다. 부서진 조각들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옷 앞섶에 주워 담고 걸어가는 사람도 보았다. 과연 나는 그럴 수 있을까? 그것은 또 옳은 일인가?


때때로 그것을 내려놓고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구석구석 살피지 않으면 얼마나 망가졌는지 알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알아채도록 정작 나만 모를 수도 있다. 또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감쪽같이 손질해서 멀쩡한 척할 수도 있다. 혹시 누군가 애써 감춘 것들이 눈에 보여도 그런 건 짐짓 모른 척 입을 다무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규칙이다.     


“시한폭탄을 가지고 사는 것 같지 않아? 언제 어디서 어떻게 터질지 알 수도 없고 장담할 수도 없는 게 결혼 생활이야.”


몇 년 전에 이혼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이런 일로도 이혼하는구나 싶더라. 어디 가서 말도 못 해. 엄마한테도 사실대로 말을 못 했다니까? 성격 차이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어 정말. 이혼한 사람들 봐라? 다들 성격 때문이라고 하잖아.”


결혼 4년 만에 이혼한 여고 동창 수아는 친구들에게 그간 함구하던 이혼 사유를 털어놓기로 작정했는지 아무도 묻지 않은 얘기를 꺼냈다.


“조루야, 남편이. 근데 나 그거 알고도 결혼했거든.”


그 얘기를 들은 한 친구는 위로인지 진심인지 농담인지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안 하는데 조루 건 변강쇠 건 뭔 상관이야?”


그 말에 수아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지나치는 사람은 누구든 두 번은 돌아볼 정도로 어여뻤던 수아는 근처의 다른 학교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곁을 주지 않아도 괜찮은 남자들이 줄줄 따랐다. 어렸던 우리 눈에도 수아는 남자 복을 타고난 것으로 보였고, 나중에 고르고 골라 결혼할 수 있겠다며 부러워했었다. 


“그때 물어보고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까운 마음에 나는 소용도 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어디다 물어봐? 내 남친이 조루인데 결혼해도 될까요? 하고 누구한테 물어보냐구. 그리고 그때는 그런 거 하나도 상관없었어. 사랑하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손만 잡아도 좋고 안아주기만 해도 너무 좋은데. 게다가 나는 원래 욕구도 별로 없거든. 그리고 애는 낳을 수 있는 거잖아.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결혼하고 나니 남편은 변했다고 했다.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 하며 수아에게 기쁨을 주기 위한 노력을 귀찮아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나 몰라라 했다. 그러면서도 두세 달에 한 번씩은 못 견디겠던지 수아에게 섹스를 요구하긴 했다. 하지만 짧은 섹스가 주는 좌절감 때문인지 그러고 나면 자기만 상처 입은 동물인 것처럼 남편의 히스테리는 더 심해졌다. 


수아가 사소한 투정이라도 부리면 낯선 눈빛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일상의 모든 것에 자격지심을 갖기 시작한 것 같다고 수아는 회상했다.


“친구를 만나서 저녁이라도 먹고 들어오면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시선이 확연한 거야. 내가 허튼짓이라도 하고 온 것처럼 말이야. 내가 아무리 다정하게 대해봐도 이미 옛날의 그 남자는 사라지고 없더라. 같이 영화도 못 봐. 신중하게 골라야 해. 영화에서 섹스 장면이 나오면 진짜 어색해지니까. 저 남자는 오래 하네, 여자가 저렇게 좋아하네. 그런 생각을 상대방이 한다는 걸 동시에 딱 아는 거야. 그 느낌 진짜 숨 막혀. 난 그저 다정하게 대해만 주면 족했는데…”


시어머니 등쌀에 결혼 2년이 지날 무렵 수아는 남편에게 아이 얘기를 꺼냈다. 아들이 없을 시간에 전화해서 수아를 채근하는 일은 결혼하자마자 시작되었다. 애 소식 없느냐, 너한테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 산부인과는 가봤느냐, 집에서도 예쁘게 하고 있어라, 여자가 밤에 나긋나긋해야 애가 빨리 들어선단다. 이쯤 되니 시어머니 때문에라도 못 살겠다고 할 정도였다.


사실 수아도 아이 생각을 하긴 했지만, 남편은 이미 수아와 섹스하는 것 자체에 부담을 갖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임신 얘기를 꺼내는 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임신을 목적으로 하는 섹스가 남편에게는 형벌 같으리라는 건 수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방도는 없었다. 배란일에 맞추어서 남편을 다그쳐 섹스해야 했는데 몇 초 걸리지 않는 섹스 시간에 느꼈을 남편의 굴욕감은 수아에게도 고스란히 상처로 남았다.


이 얘기를 하면서 수아는 눈물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수아의 얼굴이 지극히 평범해진 느낌이 들었다. 이목구비는 그대로인데 낯빛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그토록 아름답던 얼굴이 이렇게까지 달리 보일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꽤 충격을 받았다.


“그래도 몇 달 안에 임신이 되어 다행이었지. 근데 아이가 남편을 빼다 박지 않았으면 난 아마 의심받았을 거야. 그 정도야.”


이 부분에서는 누구도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모두 저마다 커피잔을 들어 조용하게 커피를 넘겼다.


“그런데 조루는 병 아니야? 약이 있지 않아? 발기부전 약이 있는 것처럼 말이야.”


친구 하나가 침묵을 깨며 물었다.


“아무렴, 있지. 있어.”


수아는 반쯤 남은 아이스커피를 쪼로록 소리가 나도록 다 마시고 한숨을 한번 크게 내뱉더니 말했다.


“병원에 왜 안 가봤겠니. 결혼 전에는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닌데 어떡해. 남편은 병원 얘기를 꺼내니까 펄펄 뛰더라. 그래도 달래고 협박하고 울고불고하면서 병원에 억지로 데려갔어. 그 문제가 조금이라도 개선되면 남편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기대했지. 또 요즘 같은 시대에 그거 하나 못 고칠까 싶었던 거야.”


친구들의 침묵 속에서 수아는 말을 이어갔다.


“조루약을 받아왔는데 그걸 섹스하기 두세 시간 전에 미리 먹어야 한다는 거야. 근데 몇 시에 딱 섹스 시작하자, 그러고 하는 게 섹스야?”


“그래도 그게 가능하다면 주말에 언제 하자, 아니면 밤 11시에 시작하자, 그렇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한 친구가 물었다. 정말 그렇게라도 섹스를 할 수 있다면 최소한 더 나빠지는 건 막을 수 있었지 않나.


“그래, 그렇게 할 수 있지. 근데 우리가 이미 다정한 사이가 아니잖아. 그 약발 오르는 시간 동안에 서로 맘이 상해버리는 경우가 있어. 그래서 해야 하는 시간이 됐는데도 그 시간에 섹스를 못 하게 되는 거지. 기분이 상했는데 비싼 약 먹었다고 그 시간에 억지로 섹스해야 해? 그런 생각이 들면 짜증만 더 솟구치는 거야. 몇 번 그러고 나니까 약 먹었다고 하면 그 시간까지 서로 기분 건드리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면서 숨죽이고 있는 그 조마조마한 시간이 미치도록 싫더라. 섹스가 어려운 숙제처럼 되어버리는 거야.”


“그 약, 그래서 효과는 어떤데?”


모두가 궁금해하는 질문을 또 다른 친구가 던졌다.


“조루 치료제라는 게 시간을 많게는 서너 배까지 지연시켜 준다더라고. 근데 약까지 처방해서 먹는다는 건 대부분 심한 사람들이거든. 5초가 10초 되는 게, 아니 30초가 된다 한들 그게 무슨 의미야? 3배나 늘었다고 좋아해야 해? 자기한테는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지. 근데 여자한테는 1초건 30초건 2분이건 쓸모없기는 매한가지 아니냐?”


수아는 피식 웃었지만 우리는 차마 따라서 웃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 약이 되게 웃긴 게 뭔지 알아?”


뭐가 더 있다고? 친구들 모두 눈이 동그래졌다.


“이 약을 먹으면 발기가 잘 안 된다는 거야. 그게 제일 흔한 부작용이래. 장난하냐구 지금. 혹 떼려다 혹을 더 붙인 꼴이지 뭐야. 그리고 언제 한 번은 남편이 되게 조르는 거야. 이렇게까지 절박하게 요구하는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다, 하면서도 뭐 가끔은 했었으니까 응했거든. 근데 어? 10초도 더 지났는데? 아, 이 사람 약 먹어서 졸랐구나? 이런 생각이 딱 들잖아? 그럼 남편이 내가 알아챘다는 걸 귀신같이 아는 거야. 그럼 바로 싸. 바로.”


“네가 생각만 해도 안다고?”


너무 놀라 큰 소리로 말하는 바람에 내 목소리에 내가 깜짝 놀랐다.


“생각해봐. 원래 피스톤도 몇 번 못하는데 10초도 넘게 하고 있다는 건 약을 먹었다는 거고, 그럼 내가 대번에 알지 않겠어? 그러면 남편도 마누라가 알아버렸겠네, 그 생각을 하고, 그러면 그 순간 싸는 거야. 말로 하니까 이게 이상한데, 아주 순간적으로 서로 알거든. 만약에 상대방이 자기가 조루라는 걸 모른다면 약도 먹었겠다, 자신감이 좀 생긴 상태니까 어쩌면 조금 더 잘할지도 모르겠다 싶어. 그러니까 이미 자기 상태를 다 아는 나랑은 약을 먹어도 안 되는 거지.”


“아니, 이게 무슨 마법의 물약 그런 거야? 상대가 몰라야 그나마 효과가 있다니, 말이 돼?”


여태 잠자코 있던 친구 하나가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 생각에는 이게 심리적인 부분이 상당히 작용하는 거 같아. 어린 시절에 뭔가 단단히 어그러진 게 있는 건지…. 시어머니가 나한테 하는 거 보면 어렸을 때 남편을 잡았는지 뭐 어쨌는지, 어디서 대단히 충격적인 걸 봤던지 그럴만한 요인이 있었겠지. 어쨌든 임신은 했으니 나는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어. 근데 한참 후에 이 사람 가방에서 그 약을 발견했다?”


수아와의 섹스에서는 소용없던 약을 발견했다니 감이 왔다. 아니나 다를까, 수아 남편은 섹스할 시간을 자기가 일방적으로 정할 수 있는 상대를 찾은 것이다. 언제든 자신이 원할 때 자신의 상태를 모르는 여자와 섹스를 하거나 자신만 즐겨도 되는 곳은 주위에 널려있었다. 


그전부터 그래 왔는지, 병원에 다녀온 후에 그나마 약발이 드는 상대를 찾기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수아 남편은 아내와는 하지 못하는 섹스를 업소에서는 할 수 있었다. 자기만의 작은 오아시스를 찾은 것이다. 어린아이를 두고 결국은 이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수아의 넋두리는 쉬이 끝나지 않았다.


“섹스를 안 하는 거랑 못 하는 건 또 천지 차이인 거야. 이건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상상하지 못할 고통이야.”     


수아의 일은 통탄할 만했지만, 내가 수아였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연애할 때 남편이 성적 무능력자임을 알았다 해도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남편과 결혼했을 것이다. 섹스 따위 중요하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사랑하는데 고작 그따위 이유로 헤어진다는 건 너무 천박하니까. 결혼하고 한참이 지날 때까지도 나는 섹스를 그렇게 생각했다.


신혼 초에 연예인 부부들이 나오는 예능프로를 본 적이 있다. 잠시 지켜보자니 결혼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가지 요소를 나열해 놓고 가장 중요한 것을 고르는 중이었다. 출연자의 대부분은 성격이나 경제적 문제 등 가지각색의 요소들을 골랐다. 


그런데 그중 한 커플이 ‘부부 관계’라는 항목을 선택했고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방청객도 진행자도 다른 출연자들도 그들의 순서가 되자 모두 웃음부터 터뜨렸다. 나는 그들처럼 따라 웃지는 않았지만, 곱지 않은 눈으로 지켜봤다.


부부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선택한 커플의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 “다들 만족스럽지 않으니까 이걸 선택하지 못한 거예요. 별로니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죠.” 지금 생각해도 상당히 당찬 발언이었다.


 이 말을 들은 일부 방청객과 출연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의 눈빛을 보냈지만, 대부분은 더더욱 왁자하게 웃었고, 어떤 이들은 뭔가 들켜버린 듯 굳은 얼굴을 잠시 보였다가 바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나는 웃었던가? 민망한 얼굴을 하였던가? 그것까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어이없다고 생각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결혼 생활에서 섹스가 제일 중요하다고? 결혼하면 다른 중요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게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저래? 천박하게 섹스 섹스 하지 좀 말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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