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사랑하는 사이 #20
연재 중이던 소설이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2021.1.15)
:: 연재소설입니다. 순서를 확인해주세요. ::
:: 19세 미만 청소년에게 부적절한 내용이 있습니다. ::
#20
아침의 커피 타임, 핸드폰을 보고 있는데 카톡 팝업이 뜬다.
“실패실패!!”
나는 인형을 안고 토닥이는 스티커를 골라 전송했다.
“오빠가 어제 너무 피곤해하면서 일찍 눕길래, 등 마사지해줄까 물었더니 빨리 자고 새벽에 일어나야 한다는 거야. 그래서 오일마사지는 포기하고 모로 누워있는 오빠 옆에 가서 목을 좀 주물러 줬거든, 그랬더니 그냥 얼른 자야겠다고 또 그러길래 그냥 나왔어. 나 나오고 바로 코 고는 소리가 나긴 했어. 작년에도 이맘때 되게 힘들어하긴 했거든. 아무래도 바쁜 거 끝나야 할 것 같아. 그래서 마사지는 실패했어. 기대했는데….”
“저런!!!”
“하하하. 언니의 ‘저런’에서 진심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느껴진다.”
나의 짧은 탄식에 웃음으로 답하는 희수. 하지만 나는 가슴이 저며서 웃음으로 받아칠 수가 없었다. 어제 신나서 한달음에 오일을 사 온 희수의 모습이 떠올랐고, 말하기 전에 몇 번이나 주저했을 희수가, 거절을 당하고도 목을 주물러 줄 마음을 먹은 희수가, 또 거부당했지만 정말 남편이 피곤했나보다 여기는 희수의 마음마저 모두 안타까워서, 내가 마사지 얘기를 꺼낸 것마저 후회가 됐다. 나를 원망했다.
동시에 희수의 남편이 미웠다. 그래도 이런 내 마음은 입 밖에 내면 안 되는 것이다. 나는 마음을 추슬렀다.
“너의 다정함은 느꼈을 거야. 그나저나 내가 책을 여러 권 봤거든. 성 전문가들이 말하기를, 나락으로 떨어진 부부 관계는 외부의 도움 없이는 다시 회복하기 매우 어렵다더라? 네가 나락으로 떨어진 건 아니지만 어찌 됐든 너는 적절한 외부를 만난 거야.”
“정말? 이렇게 운이 좋네, 내가.”
“섹스에 문제가 생기면 자기들끼리는 회복할 수가 없다면서 단정을 짓더라. 그러니까 전문 상담사가 있는 거겠지. 전문 상담사가 도움을 주면 더 빨리 회복하겠지만 나처럼 주변 누군가의 적극적 조언도 도움이 될 거야. 하지만 무엇보다 본인의 노력이 제일 중요한 거니까 너 계속 힘내!! 살다 보니까 힘들어서 그렇지 불가능한 게 없더라.”
“언니, 너무 부담 갖지는 마. 내가 노력은 해보겠지만 잘 안 될 수도 있잖아.”
희수는 이 와중에 내가 낙담할 것을 염려했다. 지금 그 걱정할 때인가. 내가 좀 실망하면 어때서. 하지만 희수의 글이 오기 전에 썼던 ‘나는 정말 너희 부부를 꼭 예전으로 되돌리고 싶어.’라는 문장을 지웠다.
“근데 의사 선생님이 정말 아무 말도 안 했다는 거야? 섹스 안 한다는 말은 했지?”
“처음 간 날 질문지를 줬는데 거기 섹스 항목이 있었어. ‘전혀 관심 없음’이라고 썼거든. 그래서 그런지 아예 언급을 안 하더라구.”
“그래? 그건 성 전문가의 영역인가?”
“정신과 쌤은 증상을 보고 그거에 대한 약을 줘. 식욕이 없고 잠을 못 잔다고 하면 그거에 대한 약을 주는 거야. 오피스 와이프 때는 상담센터에 갔었어. 그때는 상담사랑 계속 상담을 했고 그건 도움이 많이 됐어. 지금 나는 약이 꽤 도움이 돼. 잠을 그래도 잘 자게 됐거든. 밥도 좀 더 잘 먹고.”
“그때 상담센터가 도움이 됐는데 여태 그러고 있어? 복수의 칼을 갈면서? 네 정신만 갉아먹고?”
“그건 그러네. 근데 그거 말고도 오빠가 날 너무 억압하니까 힘든 거야. 돈도 그래. 난 모아 놓은 돈도 없잖아. 더군다나 비빌 언덕도 없구. 그게 내 최고 약점인 걸 아는 오빠가 돈으로 나를 흔들어 대니까 너무너무 밉고 야속해. 폭언의 끝은 언제나 자기 집에서 당장 은성이 데리고 나가라는 거야. 자기 집이래!! 그럴 때마다 나는 탈탈 털려서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어. 나한테 가장 절박한 건 사실 돈이야. 어떻게든 다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근데 오빠는 내가 직장 다니는 거 처음부터 싫어했잖아. 그래서 결혼 앞두고 오빠 뜻대로 회사도 바로 관둔 거구. 어렵게 들어간 곳인데, 이렇게 될지 모르구 말이야.”
자기 집이라니!! 희수 남편도 모든 걸 자기 혼자만의 성취라고 생각하는 그런 남자였단 말인가? 희수에게 어떤 위로를 해줘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네 남편이 혼자 충분히 벌 수 있으니까 넌 직장 안 다녀도 된다고 했던 거였잖아. 근데 돈을 안 벌면 돈 쓸 때 조금 주저하게 되는 건 있더라. 괜히 눈치 보이기도 하고.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야. 남편이 많이 벌든, 적게 벌든.”
나는 바보처럼 이렇게 뻔한 소리만 늘어놓았다.
“근데 정도가 엄청 심해. 내가 결제할 때마다 남편한테 문자가 가고, 현금을 찾을 때도 마찬가지야. 뭐만 사도 왜 샀냐고 묻고, 누구랑 갔냐, 거기는 왜 갔냐, 누구랑 먹었냐고 모든 걸 꼬치꼬치 캐물으니까 나를 너무 구속하고 통제한다는 느낌이 들어. 그렇지 않겠어? 내가 이혼하겠다고 이를 갈 정도라니까. 근데 요즘 몇 번 내가 입으로 받아 주고 그랬더니 돈 얘기가 쏙 들어갔잖아. 난 이게 너무 웃기는 거야.”
“네 남편이 마누라가 그거 몇 번 해줬다고 돈 얘기 안 하는 거겠어? ‘아이고, 마누라가 섹스를 다 하자고 하네.’ 하고 감동해서 돈 얘기를 쏙 집어넣었겠냐고. 그냥 그런 자질구레한 건 넘기게 된 거야. 그럼 하나만 묻자. 사이가 좋았을 때도 돈으로 널 억압했어? 뭐 살 때마다 묻고? 또 너한테 큰소리치고 화내고 그러는 것도 사이좋을 때 그런 적이 있었어?”
“음… 그때는 안 그랬던 것 같아. 맞아, 안 그랬어. 근데 사이좋던 시기가 결혼 초반에 아주 잠깐이고 그 담부터는 계속 안 좋은 상태니까, 모두 너무나 옛날이야.”
“결혼하고 금방 사이가 왜 그렇게 됐어? 섹스 안 하면서부터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한 거잖아. 그럼 모든 문제의 원인, 알겠어?”
“확실히 그런 것 같네.”
“네 남편은 어떤 것이든 좋게 넘어갈 수 없는 상태가 된 거야. 없는 트집도 잡게 생겼어. 맞다! 최근에 읽은 책에도 이런 내용이 있었어. 성적으로 불만이 쌓이면 화를 내기 시작한대. 이건 여자도 똑같대. 지난번에 오빠가 너 만났을 때 얘기했었지? 그게 책에 나와 있더라니까? 부당함을 당한 것처럼 계속 화가 난다는 거야.”
“아!”
“화를 내기 시작하는 건 성적 불만족의 전형적인 반응이고, 그건 버릇이 된대.”
“맞는 것 같다. 계속 화만 내는 사람이 되어버렸거든. 그래서 난 늘 두렵고.”
“그리고 나 궁금한 게 있어. 남편이 예전에 블로우잡이랑 핸드잡 해달랬다고 했잖아. 그러면 그때 남편도 너한테 해줬어? 아니면 자기만 받았어?”
“나한테도 해줬어. 삽입하면 아프니까 다른 식으로 했던 거야.”
“그치. 자기만 받는 건 말이 안 되지. 그럼 그 시간은 대충 비슷하게는 해 줬어? 너한테도 충분하게 해 줬는지, 자기 끝났다고 너한테는 하는 시늉만 했는지 물어보는 거야.”
“뭐 충분하다고 생각했어.”
“야야, 네 남편은 그래도 된 사람이다. 싸가지 없는 인간은 자기는 정말 안 해준대. 해도 대충 시늉만 하고.”
“근데 언니, 오빠는 아픈 게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거라고 계속 나를 몰아붙였어. 보통은 여자가 아프다고 하면 남자가 미안해야 하는 거 아니야?”
“초반에 어느 정도까지는 이해하지만 계속 아프다고 하면 싫어서 그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맘이 상할 수도 있을 것 같아. 해보지도 않고 싫다고 한 적도 있을 거 아니야.”
“물론 그런 적 있지. 하지만 아플 걸 아니까 하기 싫은 거였어.”
“근데 시도도 계속 안 하면서 아프다고 내키지 않는 내색을 하면 이해가 안 가고, 싫다는 의사 표현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서로 대화를 안 하고 짐작만 하니까 문제가 커진다.”
“근데 딱 한 번이었지만 전희를 진짜 오랫동안 충분하게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땐 안 아팠어. 그러니까 내가 열이 받아 안 받아? 그래 놓고 나한테만 문제 있다고 말하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
“뭐라고? 그럼 그걸 얘기했어?”
전희를 충분하게 했을 때 안 아팠다? 그럼 몸이 충분히 데워지지 않아서였다는 얘기 아닌가! 한 번이지만 안 아팠던 경우가 버젓이 있었는데도 해결점을 못 찾고 섹스리스가 되었다니, 뭔가 이상한데?
“나는 오빠가 너무 못하니까 내가 아픈 거라고 했어. 우린 계속 서로를 비난했어.”
“어휴, 서로 그러면 일이 해결돼?”
“어쨌든 오빠는 계속 오럴하고 핸드잡만 요구했는데, 그때 형부 앞에서는 말을 못 했지만 내가 약간 업소 여자가 된 느낌이 드는 거야. 매번 그러고만 있으니까. 그래서 거부한 거야. 나는 다시 섹스 시도하면 어떨까 했었는데 서로 맘이 상한 상태라서 오빠도 더는 요구하지 않았어. 근데 난데없이 일 년 만인가 오빠가 너무 졸라서 했다가 그 한 번에 덜컥 은성이가 생겨서 나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어. 이게 우리 섹스 스토리의 전부야.”
“그럼 최근에 다시 시작한 이후에는 삽입 섹스를 얼마나 했어? 이젠 너 안 아프다는 얘기는 확실하게 했지?”
“당연히 이제 안 아프다는 얘기는 했지. 근데 내가 난생처음 상위 한번 했던 거 빼고는 계속 오빠한테 오럴만 해줬어. 오빠는 나한테 식은 것 같아.”
여태 그러고만 있었다니, 희수 남편은 대체 무슨 생각일까. 내 머리로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왜 벌써 남편이 식었다고 판단해?”
“난 내가 먼저 건드리기만 하면 오빠가 무조건 환장할 줄 알고 용기를 낸 거였어. 근데 몇 번 시도해본 결과 저 인간이 거부하기도 하고, 한다 해도 줄곧 서비스만 받고 있으니까.”
“의기소침하지 마. 이미 남편이 예전과 달라졌잖아. 시간이 좀 필요한 거야. 네가 좀 기다려 줘.”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나라면 이 상황에서 일방적인 노력을 하면서 남편의 변화를 기다려 줄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희수에게 계속 용기를 북돋아 주는 수밖에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희수가 앞으로 남은 인생을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거다.
“아이러니한 게 내가 오빠에 대한 마음이 완전히 식은 상태였잖아. 그래서 거부당해도 전혀 아무렇지 않고 상처를 안 받을 자신이 있었어. 그래서 들이댈 수 있었던 거야.”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실제로 너처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물 거야. 너는 정말 용기 있었어!”
“용기가 아니었어. 나는 오빠한테 느낄 민망함조차도 없었던 거야.”
내 마음에서 어떤 끈 한 가닥이 툭 하고 끊어졌다. 넌 대체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었던 거니.
“우리 발랄한 희수가 왜 그렇게 기가 죽었어? 그래서 너의 마음 말이야, 남편에 대한 애정이 조금이라도 생긴 것 같아?”
“솔직하게? 아직 변화는 없어. 난 뒤끝이 심하잖아.”
“너의 마음이 지금 그렇다 해도 결국은 좋아지는 거야. 안 그럴 거 같지? 아니다? 이거 내 생각 아니고 순전히 전문가들의 말이니까 믿어봐. 그리고 이제 그만할 때 됐어. 네 뒤끝으로 너나 남편은 물론이고 은성이까지도 힘들어지는 거야.”
“남편은 내지르는 성격이라서 다 잊었을 거야. 나는 그런 사람이 너무 싫어. 할 말 못 할 말 다 해서 상대방한테 상처 줘놓고 자기는 뒤끝 없다는 사람.”
“희수야, 너에게 알려주고 싶은 문구가 있어. 연인은 사랑해서 섹스하고, 부부는 섹스해서 사랑한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