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작가는 중간에 때려치우지 않는 사람
이번에는 존 가드너의 '장편 소설가 되기'를 살펴본다.
<장편 소설가 되기 - 존 가드너>
"작가는 자기가 한 이야기를 거듭 응시하는 과정을 통해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 깨닫는다는 것이 그의 기본 신념이었다. 그리고 이 응시, 더 명확한 응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고쳐 쓰기 작업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고쳐 쓰기, 무한 고쳐 쓰기를 신봉했다. 그가 가장 중시하고, 성장의 어느 단계에 놓여 있든 모든 작가에게 필수라고 강조 하는 게 바로 고쳐 쓰기였다."
('장편 소설가 되기' 중에서 레이먼드 카버가 존 가드너를 회상하며 쓴 글)
무한 고쳐 쓰기라......
많은 작가들이 도저히 더는 할 수 없을 정도까지 수정한다고 수없이 말했다.
근데 나는 고작 10번의 퇴고를 하고 나면 투고할 생각을 하는 것이다.
"내가 3차 때 수정을 했는데, 그것을 4차 수정 때 2차 때의 표현으로 다시 고치고 있는 거면 어떡하지? 아니면 수정을 거듭할수록 점점 더 이상해지고 있는 것이면 어떡하지?"
남편에게 나는 이런 걱정을 털어놓았다.
남편은 정말 지겨운 일인데도 내가 수정을 하면 그 원고를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심사숙고해서 읽어준다. 그리고 코멘트를 해주는데, "수정할수록 나아진다는 것은 확실해."라고 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의문이 든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질러서는 안 될 금기 사항이 있다. 표현과 감정이 진실하지 않으면, 날조가 있으면, 작가 자신이 마음에도 없고 믿지도 않는 내용을 쓰면, 그 누구의 관심도 끌 수 없다."
이건 누구나 강조하는 것이다. 진실하지 않은 감정을 쓰는 것은 대단한 잘못이라고. 모호하고 애매해서 두 번 세 번 거듭 읽고 짐작해야 어렴풋이 의도를 짐작할 수 있는 글은 좋은 글이 아니라고 대작가들은 입을 모아 얘기한다. 단숨에 이해가 가는 문장이 좋은 문장이라고.
독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의도의 글도 있다. 의도한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있어 보이는 글'을 종종 본다. 어렸을 때는 그런 글을 동경했다. 있어 보이니까. (ㅎㅎ) 하지만 그걸 아무리 동경한데도 나는 그런 걸 쓸 수가 없었다. 단지 있어 보이기 위해 내가 평소에 안 쓰는 단어를 일부러 찾아서 쓰기란 참 힘든 일이었다.
아, 있어 보인다는 말이 나오니 유시민 작가가 방송에 나와서 했던 말이 생각난다. 검색해보니 이 부분이 많은 사람들에게 와 닿았는지 짤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존 가드너도 책에 비슷한 말을 썼다.
"전달하려는 내용보다는 현란한 전달 방식에 치중한 나머지 그것들을 멋들어진 잡음 속에 묻어버린다. 작가가 등장인물보다는 자신의 재능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산다."
한마디로 있어 보이게 써서 자신을 뽐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일반 독자들에게 뭐가 됐든 15페이지가 넘는 글을 읽히려면 꼭 필요한 첫째 요건인 '술술 읽히게 쓰기'를 충족시킬 방법을 찾아야 한다. 평범한 독자에게는 책장을 계속 넘겨야 할 이유가 필요하다. 그런 독자들이 책을 계속 읽게 만들 두 가지 요소가 논쟁과 이야기다."
또 나온다. 술술 읽히게 쓰기.
술술 읽히는 쉬운 문장이 좋다. 소설이든 에세이든 교과서든 뭐든. 생각해야 하는 품이 너무 들면 결국 책을 덮고 마니까. 아무리 잘 써도 읽어주지 않으면, 독자가 중간에 덮어버리고 만다면 무슨 소용인가. 책을 덮는 건 재미가 없어도 마찬가지인데, 보통 재미가 있는 책은 술술 읽힌다.
"거의 모든 초고는 글러먹었다."
모든 유명 작가들이 한결 같이 이 말을 하고 있다. 존 가드너도 마찬가지. 그러니까 자신의 초고를 보고 실망하는 것은 금지. 무한 고쳐쓰기를 하면 좋아진다는 것을 믿자.
정유정 작가도 완성작에서 초고의 10%가 남아 있을까 말까라고 했다.
"모든 글쟁이는 찬사와 출판을 먹고 자라거니와, 그중 장편 소설가는 이익이 날 수도 나지 않을 수도 있는 투자를 크게, 장기적으로 하는 글쟁이다."
이익이 거의 나지 않을 것이 분명한 장편소설 작가. 그나마 출간이 되면 흥행 여부는 상관없이 그것만으로도 성공이라 볼 수 있는 분야이다. 아니다. 출간 여부와 상관없이 장편을 완결했다는 것만으로도 성공 아닐까?
나는 20대부터 소설 쓰기를 염원해 왔다. 시작은 하지도 않고 숱하게 생각만 했다.
구상한 내용도 몇 개나 된다. 책을 내보긴 했지만 나는 소설을 써보고 싶었다. 아는 것이라고는 학교에서 배운 소설의 시점 정도가 다이고, 한 편의 습작조차 없으면서 처음 덤빈 것이 장편소설이다. 그래도 끝내 써낸 것에 스스로 박수를 보낸다.
"진짜 소설가는 중간에 때려치우지 않는 사람이다."
"모두가 생각은 죽도록 하지만 끝까지 써내는 사람은 드물다. 이 긴 글을 결국 써내고 몇 달째 지겨운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네가 작가이기 때문이야."
남편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며칠 전에는 내게 편집자가 생기는 꿈을 꾸었다. 내 글을 출간해주기로 마음먹은 출판사가 생겼다는 뜻인데, 꿈에서도 나는 내 글을 편집자에게 보여주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꿈속의 편집자에게 '앞으로 되게 많이 고칠 거거든요?' 하면서 보여주고 있었다. (한숨)
진짜 소설가는 중간에 때려치우지 않는 사람이다, 라는 말에 기운을 내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진짜 소설가이고,
내 소설을 브런치에서 연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