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in 제주 그림일기 - 게스트하우스 스텝으로 두 달 살기
음력 새해인 오늘. 서울이었다면 외가와 친가 댁을 들렀을 테지만 어쩌다 이렇게 제주에 있게 되었으니 영상통화로 식구들에게 인사를 대신했다. 작년에도 음력 새해에 인도 여행을 하느라 타지에 있었는데 이 년 연속으로 이럴 줄은 작년의 나도, 아니 불과 한 달 전의 나도 몰랐던 일! 사람 일이라는 건 역시 예측불허다. 그래서 재미있기도 하고.
특별한 날에 감사하게도 아침부터 저녁 무렵까지 날씨가 쭈욱 맑았다. 내일 비 소식이 있어 오늘 맑은 모양이라고 언니가 말했다. 그러다 갑자기 언니는 근처 오름에 가서 일몰을 보는 건 어떠냐고 급 제안을 하셨다. 사진을 취미로 찍는 언니는 유독 일출과 일몰을 좋아하신다고 전부터 말씀하셨다. 어느 오름이 좋을지 찾아보겠다고 하고 열심히 검색을 시작했다. 시간이 5시 무렵이라 일몰 시간을 맞추려면 너무 먼 곳은 안 될 테고 거리가 적당하면서 사진이 잘 나올 곳이 어딜까 찾아보았다. 그러던 중 '다랑쉬오름'이 눈에 들어왔다. 게스트하우스에서 거리도 멀지 않고 풍경도 예쁜 것 같아 언니에게 바로 여기를 가자 말씀드렸다. 언니도 사진을 보시더니 오케이 하셨고 우리의 든든한 (운전기사) 스텝 오빠와 함께 다랑쉬오름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출발하고서 얼마 되지 않아 날씨가 급격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태양이 구름에 가려졌다 말았다 하는 모습에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다랑쉬오름에 가까워져 오빠가 "저기다!" 하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을 때, 눈 앞에는 웬 우뚝 솟은 산이 있었다. 예사 높이가 아니란 걸 눈치챈 이때, 그렇다. 이때 차를 돌렸어야 했어...
오름 입구에 서서 위를 봤을 때 그 위용이란. 나무가 우거진 모습이 꼭 사려니숲의 오름 버전에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만만치 않은 높이일 것 같았지만 그래도 도착했으니 끝장을 보자며 오르기 시작했다. 한 십분 올랐을까? 점점 발걸음이 느려지고 숨이 가빠왔다. 이윽고 들리는 언니의 외침 "야 여기 x 힘들어!" 뒤따라 말하는 오빠 "여기 가자한 사람 누구야..." 힘든 와중에 섬뜩했다.
다랑쉬오름은 경사도 경사지만 그 길이가 정말 엄청났다. 보통 오름이란 이십 분 정도 천천히 오르면 정상에 오르기 마련인데, 우리 생각을 비웃는 듯 길은 계속되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르막길 한 번이 나왔다 하면 그다음은 덜 경사져서 옆으로 걷는 길이 나오는 식으로 번갈아 구성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그래도 덕분에 할 만하네 라고 생각했다가도, 이게 끝이 날 기미가 없으니 점점 얄미워졌다. 밀당하는 것도 아니고! 올랐다 걸었다 결국엔 힘든 건 똑같잖아! 거칠어지는 숨결 따라 성질도 덩달아 거칠어지고 있었다. 정말 위험한 오름이었다!
올라가다 주저앉았다를 몇 번 반복했을까.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기쁨도 잠시, '이게 아닌데' 하는 싸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 둘러봐도 회색빛의 하늘. 우리가 지금껏 참고 견뎌왔던 이유인 '예쁜 일몰'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해는 구름에 가려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언니는 믿고 싶지 않아 했고 오빠는 (정말로) 나를 분화구에 떨어뜨릴 것 같아 멀찌감치 피해 있었다. 멋진 일몰 사진을 남기며 힘든 시간을 보상받을 거라 생각했는데, 너무나 아쉬운 일이었다. 새해부터 우리한테 왜 이래!
그래도 아쉬움과 별개로 다랑쉬오름의 전경은 정말 멋졌다. 정상엔 엄청난 크기의 분화구가 있었는데, 그 깊이는 한라산의 백록담과 비슷한 정도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제주에서 가장 좋았던 장소 중 하나가 산굼부리인데 다랑쉬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분화구에서 느껴지는 깊이 있는 울림은 여느 오름과 다른, 다랑쉬만이 줄 수 있는 매력이었다. 분화구에서 경치로 눈을 돌려보았을 때, 저 멀리 한라산이 보였다. 비록 안개과 구름 속에 숨겨져 있지만 그 위용은 절대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듯했다. 볼수록 신비감에 빠져드는 풍경이었다. 게다가 우리가 정말 놀랐던 것은 정상에 오르자 모든 오름이 우리 아래에 있었단 것이었다! 과연 '오름의 여왕'이었다. 아니지, '오름 계의 한라산'이라는 칭호도 아깝지 않다! (*실제로 다랑쉬오름은 제주에서 높은오름 다음으로 가장 높은 오름이라고 한다. 우린 왜 조금 더 찾아보지 않았을까! 저녁 산책 삼아 정말 가볍게 후딱 다녀오려던 길이었는데!)
후들거리는 다리로 내려오면서 우린 다랑쉬에 갔으니 이제 어떤 오름이든 우습게 갈 수 있겠다며 쓰게 웃었다. 마지막까지 오빠는 열 받아하며 나를 빼놓고 출발하려 해 힘껏 뛰어서야 겨우 차 문을 붙잡을 수 있었다 ^ ^ 그래도 다랑쉬덕에 잊지 못할 음력 새해의 추억이 하나 더 만들어졌다!
: 구좌읍 송당리와 세화리에 걸쳐 있는 높고 넓은 오름.
: '오름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그 생김새가 우아하기로 유명합니다.
: 오름 초보자에겐 다소 힘들 수 있으니, 더 낮은 오름(ex 용눈이오름)을 먼저 도전하시길 추천합니다.
: 평소 오름은 조금 낮아서 심심하다 느끼셨던 분들이 있다면 강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