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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 Dec 30. 2023

사소함의 갈림길에 서서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보자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다산책방 2023



"우린 참 운이 좋지?"


이제 곧 마흔 줄에 들어서는 석탄 목재상 빌 펄롱은 아내 아일린과 다섯 딸과 함께 배로 강이 흐르는 뉴로스 타운 시내에서 살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혹독한 겨울은 벼린 칼날처럼 한기가 느껴지고 수많은 사람들을 춥고 배고프게 했다. 하지만 석탄과 무연탄, 장작 등을 파는 펄롱의 가게는 전화통에 불이 나고 트럭 타이어가 닳을 정도로 장사가 잘 되었다.


아일린은 눈치가 빠르고 직감이 좋다. 현실적인 판단을 하고 부지런히 살림을 일구었으며 남편과 어린 딸들을 살뜰히 챙겼다. 첫째와 둘째 딸은 둘 다 똘똘해서 평판이 좋은 중학교에 다니는데 큰애는 아빠의 사무실에 나와 장부 정리를 하면서 벌써 일을 돕고 용돈벌이를 했으며 둘째는 합창단원이고 셋째와 넷째 아이도 음악에 관심이 많아 수녀원에서 아코디언을 배운다. 막내는 책을 좋아하고 그림을 잘 그리지만 아직 어려서인지 수줍음과 겁이 많아 아빠의 걱정을 자아낸다.


펄롱은 젊어서부터 일머리가 있어 믿음직한 사람이었다. 여러 사람들과 잘 지냈고 술을 즐기지 않았으며 행복한 가정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알았다.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22p) 알았기에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았고", 장래성이 있는 "딸들이 잘 커서 도시에서 유일하게 괜찮은 여학교를 무사히 졸업하도록 뒷바라지하겠다는 결심"(24p)을 굳히며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펄롱은 종종 옛날 일을 떠올렸고 가끔 다른 삶과 다른 곳을 상상했으며 주변의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자꾸 신경 쓰였다. 어릴 때 학교에서 비웃음과 놀림을 당하곤 했는데 그가 미혼모의 자식이었기 때문이다. 펄롱의 엄마는 열여섯 살에 미시즈 윌슨의 집에서 가사 일꾼으로 일하던 중 임신을 했고 아빠가 누군지 모르는 펄롱을 낳았다. 이런 곤란한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계속 머물게 해 준 미시즈 윌슨 덕분에 펄롱은 엄마의 죽음 이후에도 어른이 될 때까지 학교에 잘 다니며 건강히 지내고 아일린과 약혼할 때 경제적인 도움도 받을 수 있었다.


펄롱의 지난 시간이 지우고 싶은 아픈 과거가 되지 않았던 건 누군가의 어려운 사정에 등 돌리지 않고 관심과 배려, 친절을 아끼지 않은 미시즈 윌슨과 농장 일꾼인 네드의 무심한 듯 다정한 (무심함은 펄롱을 위한 헤아림이었을) 모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다섯 아이를 키우는 아빠가 된 펄롱은 아이를 잘 키워 좋은 사람이 되도록 이끄는 건 어른들의 바른 몫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 아이만 중요하고 다른 아이에게는 무관심한 어른의 이중적인 면이 자신한테도 있어서 괴로워한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지나고 나면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 각자에게 주어진 나날과 기회들은 지나가면 돌이킬 수 없기에 어떻게 써야 할지 매 순간 고민한다. 이 일이 끝나면 바로 저 일을 하며 잠시도 쉬지 않는 아내에게 "자기 자신한테 따라 잡히지 않기 위해"(38p) 쉬엄쉬엄하라고 말하고,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냐"며 "세상에 맞설 용기"(119p)를 낸다.


아무것도 달라지지도 바뀌지도 새로워지지도 않을지언정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행동으로 옮기며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는"(120p) 기쁨을 느낀다. 우리가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는 온갖 사소함의 합이 하나의 삶을 이룬다는 단순한 진실을 깨달은 펄롱은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어쩌면 평생 마음의 짐으로 지고 살 수도 있었을 일'(121p)을 순진한 마음으로 해낸다.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


여기저기 기운 기다란 천 모양으로 내려앉은 저녁 안갯속에서 구불구불한 도로를 우회전, 좌회전하며 헤매던 펄롱 앞에 나타난 노인이 해준 말은 길을 잃은 자가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를 명확하게 제시해 준다. 아마 그건 사람들이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일이며 펄롱 자신한텐 아무 '상관'도 없고 무슨 '책임'도 없는 사소한 일이겠지만 세상에 꼭 필요한 일이자 한 소녀를 구하는 길이었다.


펄롱의 외투를 어깨에 걸치고 부축을 받으며 맨발로 걷던 소녀의 눈에 광장에 설치된 크리스마스 전등이 보인다. 소녀는 그곳에 놓인 조각상들을 넋 나간 듯 쳐다보지만 요셉이나 마리아, 동방박사나 아기 예수를 보는 게 아니었다. 소녀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당나귀, 아이는 손을 뻗어 당나귀를 쓰다듬고 귀에 쌓인 눈을 털어주며 "귀여워요."(119p)라고 말한다. 소녀에게 중요한 존재는 그저 구유를 '지키는' 당나귀였고, 마을 사람들의 잔인한 말과 냉정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를 '지켜주는' 펄롱이었을 것이다.


18세기에서 20세기말에 있었던 막달레나 세탁소를 배경으로 가톨릭교회와 아일랜드 정부가 공모해 외면하고 방치한 여성들의 이야기. 타락한 여성이라는 명분으로 수용해 노동력을 착취하고 임신한 여성들과 아이들을 학대하며 잔혹하게 죽음으로 내몰았음에도 성직자는 물론 동네 사람들 조차 묵인했던 실제 이야기. 클레어 키건이 정교하게 빚어낸 아름답고 맑은 서사 속에서 과연 펄롱은 수녀원에서 구출해 낸 미혼모 소녀를 세상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을까.


멀리서 보고 겉으로만 보면 고요하고 평화롭지만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온갖 부당함이 도사리고 있는 세상. 자기 보호 본능이 치솟고 사방이 조여지는 불안감과 나 몰라라 달아나고 싶은 충동이 엄습하지만 맞서 단단하게 버티고 선 펄롱의 작은 존재감은 수많은 사람들이 희미하게 남긴 어지러운 발자국 위에 선명한 단 하나의 자국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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