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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 Jan 06. 2024

이 이야기는 누구의 것이며 나의 이름은 무엇인가

빈 종이를 마주하고 앉은 그대에게

『내 이름은 루시 바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문학동네 2017


오! 나는 이 책을 너무나 사랑한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글은 읽는 순간 꼼짝 못 하게 되는데 책 속 인물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올리브 키터리지가 미래라면 루시 바턴은 과거이자 현재였다.


자기가 하게 되는 이야기는 오직 하나일 거예요.
하나의 이야기를 여러 방식으로 쓰게 될 거예요.


나는 무슨 이야기를 글로 옮기고 싶은 걸까. 여러 카테고리로 나누고 이렇게 저렇게 접근 방향과 주제, 주체와 표현 방법을 달리해보지만 결국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달라지지 않고 고쳐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영영 고집스럽게.


미련한 집요함은 사람에 대한 기억과도 관련 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다른 사람에게 나는 어떻게 비치며, 그들에 대해 얼마큼 정확하게 알고 있는가. 내가 믿고 싶은 딱 그만큼만 이해하고, 내가 아는 걸 진실 혹은 전부라고 믿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책은 루시 바턴이라는 인물의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고 있다. 대부분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한다. 그건 전지적 시점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녀가 겪은 유년기와 잘 알고 있는 부모님, 오래전에 알았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담고 있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그녀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젊은 시절에 아빠는 전쟁터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아빠와 살며 엄마는 어떻게 버텼는지, 아빠와 엄마는 어떤 '기억'을 갖고 있는 분인지 알 수 없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삶, 나에게 흐릿하게 떠오르는 시절의 그분들 삶은 어떠했는지 세세하게 알지 못한다. '추측'으로 이루어진 '앎'은 어느 날 눈부신 선물처럼 다가오기도 하지만 검은 슬픔으로 가득 차 오르기도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집단보다 스스로를 더 우월하게 느끼기 위해 어떤 방법을 찾아내는지가 내게는 흥미롭다. 그런 일은 어디에서나, 언제나 일어난다. 그것을 뭐라고 부르건, 나는 그것이, 내리누를 다른 누군가를 찾아야 하는 이런 필요성이 우리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저속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111p)


1980년대 중반의 어느 봄과 여름을 거치는 9주 동안 루시 바턴은 병원에 입원한다. 단순히 맹장수술을 받기 위해서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열이 나서 계속 머물게 된다. 그때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엄마가 나타난다. 사위의 연락을 받고 엄마는 먼 길을 달려왔고 딸 옆에서 5일 밤낮을 간호한다. 매일 의자에 앉아 쪽잠을 자면서 엄마는 자신이 오래전에 알았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그런데 엄마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 여자들은 하나같이 결혼 운이 없었고 좋지 않은 결말을 맺는다. 바람이 나서 남편에게 버림받거나 남편이 바람나기도 하고 갑자기 남편이 죽어버린 여자들. 베트남전 참전 후에 PTSD에 시달리는 남편을 돌보는 여자의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들려주는 엄마는 그 사람들의 삶을 '자기중심적'으로 평가하며 엄마의 처지가 그들보다는 낫다는 식의 말을 강박적으로 한다. "감정과 말과 관찰이 오랫동안 자기 안에 꾹꾹 눌려 담겨 있었던 것처럼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16p) 억제된 다급함을 담아서 말한다.


살면서 누구에게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고 어떤 우월감도 느껴보지 못한 엄마, 벌을 준다며 때리고 트럭에 가두어 놓고도 의식하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 전쟁에서 자신이 저지른 일로 하루도 빠짐없이 괴로워하는 아빠, 아이들을 달래듯 아내를 안아주지 못했던 아빠, 힘 없고 가난했기에 세 아이를 보호하지 못했고 불완전한 사랑을 줄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


그들은 아이들이 세상을 어떤 곳으로 인식하게 될지, 결코 잊지 못할 그것이 무엇인지, 얼마나 무섭고 외로울지, 너무 커서 울음조차 나오지 않는 아픔과 갈망이 아이 평생을 따라다닐 거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삶이 버겁고 세상이 무섭고 누구보다 자기가 가장 외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루시 바턴은 단 한 번만이라도 엄마가 딸의 삶에 대해 다정하게 물어봐주기를 원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고 따뜻하게 안아주기를 바란다. 부모가 가진 고통과 무관심으로 인해 아이들은 때때로 절박하게 운다. 지쳐서 혹은 심술이 나서. 마음과 영혼은 숱한 이유로 지쳐 잔뜩 웅크리고, 어떤 순간의 조건에 의해 사나워진다. 유년의 들판에 선 아이는 적막한 옥수수밭 한가운데에 서 있는 나무를 끌어안고 들리지도 않는 옥수수 자라는 소리를 듣고 심장이 부서져라 간절한 눈물을 터뜨린다. 그건 아이가 낼 수 있는 가장 순전한 소리다. 그러나 부모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싫어한다. "얘가 도대체 왜 이래!"하고.


아프고 또 아픈 건 상처 때문이 아니다. 지우려 해도 지우지 못하는 건 흉터만이 아니다. 말로는 차마 할 수 없는 어떤 의미에 대한 인정을 못 받고 커버린 아이들은 친숙한 사람이 아닌 낯선 이들의 친절로 구원을 받기에 한없이 슬퍼진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내 것이다. 이 이야기만큼은.
그리고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이다.


외로움을 인생의 첫맛으로 알아버린 루시 바턴은 글을 쓴다. 책이 외로움을 덜어주었기에 어떤 사람도 외로움에 사무치는 일이 없도록 글을 쓰겠다고 다짐한다. '기억'을 구성하는 '앎'의 조각을 하나하나 끼우고 맞춘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분신과 같은 작중 작가 세라 페인의 말처럼 타인과 자신에 대한 어떤 평가 없이 빈 종이와 마주한다. 갑자기 가버린 엄마, 무사히 집에 도착했는지 전화 한 통 없는 엄마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엄마가 와주고 이야기를 들려줘서 참 좋았다고 말한다. , 임종을 지키고 싶어 하는 루시를 거부하는 엄마를 떠나면서 엄마가 보고 싶을 거라고, 엄마를 사랑한다고 외친다.


슬픈 기억들은 마음을 아프게 하고 행복한 기억도 아프긴 마찬가지다. "펄떡거리는 심장이 한 번씩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끌어안고"(217p), '눈먼 박쥐'(205p)처럼 냉혹하게 글을 쓰며 앞으로 나아가는 루시 바턴.


나는 그녀처럼 내가 쥐고 있는 날것의 기억들에서 결코 시선을 돌리지 않을 수 있을까.각색하거나 미화하지 않은 그대로를 사람들에게 펼쳐 보일 수 있을까. 창피하고 은밀한 진짜 이야기를 글로 써 내려갈 날이 나에게도 올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내 이름은 무엇인가.' 지금 이 순간 나는 눈앞에 텅 빈 종이를 마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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