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에 스며드는 情을 믿어보자
(처음)
그러던 어느 날 애디 무어는 루이스 워터스를 만나러 갔다.
오월,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기 바로 전의 저녁이었다.
그녀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그 너머는 칠흑이었다.
당신, 거기 지금 추워요?
(끝)
어떤 책이든 첫 줄과 마지막 줄을 여러 번 반복해 유심히 보는 편이다. 일부러 그 부분만 발췌해 필사를 하기도 한다. 작가가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시작하고 끝맺음하는지가 나에게는 훨씬 의미 있었다. 그런 면에서 켄트 하루프의 글을 아끼는데 이 책은 조금 더 색다르게 다가왔다고 할 수 있다. 책의 첫 문장은 이야기의 처음이 아니었고 끝 문장이 마지막도 아니었다. 과거와 미래는 인물들의 기억과 상상 속에 머물고 그저 담담하게 현재를 술회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의 삶이 진행형인 것처럼.
딸은 사고로 죽고 아들은 결혼을 해서 떠나고 남편까지 여읜 애디에게 하루하루는 무심하게 흐르는 시간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마음을 먹는다. 길 건너에 살고 있는 남자를 찾아가기로. 그 남자 루이스도 상처하고 딸은 시집보내고 혼자 살고 있긴 했어도 둘은 오래전부터 얼굴만 알고 지내온 이웃사촌이다. 무덤덤한 사이에 불과한 루이스를 보면서 애디가 단도직입적으로 꺼낸 말에 멍하니 놀라고 말았다.
가끔 나하고 자러 우리 집에 올 생각이 있는지 궁금해요.
뭐라고요? 무슨 뜻인지? 어안이 벙벙해 묻는 루이스에게 애디는 그야말로 정직하게 대답한다.
난 외로워요. 당신도 그러지 않을까 싶고요.
그래서 밤에 나를 찾아와 함께 자줄 수 있을까 하는 거죠. 이야기도 하고요.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느라 루이스의 뇌는 바쁘다. 육체가 외롭다는 건가? 그럼 성관계를 원하는 시추에이션? 그런데 지금 자기 앞에서 이런 놀라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는 여자는 일흔 살 백발의 이웃 여자다. 누구라도 황당해할 상황인데 계속되는 애디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만 아득해지고 말았다.
밤을 견뎌내는 걸, 누군가와 함께 따뜻한 침대에 누워 있는 걸 말하는 거예요.
나란히 누워 밤을 보내는 걸요. 밤이 가장 힘들잖아요.
아! 참을 수 없는 노년의 외로움이라니. 밤이라는 기나긴 물리적인 세계를 홀로 견뎌야 하는 그 허전함이라니.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36.5도의 몸과 곁에 둘 수 없는 존재의 무능이라니. 애디가 원하는 건 사실 별 게 아니었다. "밤중에, 어둠 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10p) 수면제를 먹거나 침침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책을 억지로 읽지 않더라도 밤의 영혼을 가만가만 잠재워 줄 단 한 사람.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고 잠들 때까지 옆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자신의 이야기에 고개 끄덕이며 들어줄 친절한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애디의 말에 루이스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언제 시작하고 싶은데요?
노년의 이런 관계가 당최 납득이 안 되다가 선뜻 이해로 다가온다. 나에게 남편이란 꼭 필요하면서도 가끔은 귀찮은 존재다. 아니 좀 솔직하자면 각자의 방에서 자고 싶을 때가 많다. 이전에는 충분하다 싶던 침대 사이즈가 왜 그렇게 좁아 보이는지 답답하게 느껴졌고 컨디션에 따른 방어기제가 육체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서로의 뒤척임에 방해받지 않고 수면의 양과 질을 조절하면서 자보는 건 어떨까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러니 혼자 잔다는 건 어쩌면 속편함과 동격이 되어가던 나에게 애디의 말은 이해불가였지만 '만약 집에 아무도 없다면, 그것도 밤에'라는 상상을 하자 견딜 수 없어졌다. 어떻게 외간 남자에게 그런 생각을 말할 수 있지? 애디의 과감함에 갑자기 응원의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 든다.
이제 그들은 밤마다 만나기로 한 남녀가 되었다. 루이스는 머리와 몸을 깔끔하게 신경 쓰지만 사람들 이목도 신경이 쓰인다. 작은 마을 홀트에서 40년 이상을 살아온 둘을 모르는 이는 없었으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관심 갖지 않기로 결심했으니까요.
너무 오래, 평생을, 그렇게 살았어요. 이제 더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당찬 소녀 같은 애디는 자신과 루이스가 앞으로 해야 할 행동이 "몹쓸 짓이나 망신스럽고 남부끄러운 일"(13p)이 아니라고 말한다. 마을에서 오랫동안 고등학교 영어선생님을 했던 루이스에게도 그건 "용기, 모험에 뛰어드는 의지"(14p), "자유로워지겠다는 일종의 결단"(60p)으로 비쳤고 두 사람 모두에게 "좋은 쪽의 낯섦"(18p)이었음은 당연했다.
방이 깜깜해졌다. 바깥에서 들어온 희미한 빛밖에는 없었다.
어두워야 더 잘 보이고 고요해야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깜깜한 방에 나란히 누워 그들은 서로에 대해 알아간다. 젊을 때와 같이 "앞뒤를 재지 않는 긴박감"(48p)에 사로잡혀 성급하게 육체의 갈망을 해소하는 게 아니었다. 어둠이 녹아있는 공간과 멈춘 듯 흐르는 시간을 고스란히 느끼며 소소한 것들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것. 서로의 남편과 아내, 아이들, 이웃, 그리고 자잘한 일상 이야기말이다. 녹진한 체력 소모가 없어도 애디는 새근새근 아기처럼 잠들어 아침까지 깨지 않고 푹 잤고 루이스가 숨 쉬는 소리를 모닝알람으로 들으며 깨어날 수 있었다. 루이스의 삶이 활기를 띠게 된 것도 물론이다. 친숙한 어둠에 깃든 건 화르르 타오르는 불같은 사랑이 아니라 잔잔하게 흐르는 물의 우정이었고, 그들의 믿음이 어우러진 만남은 노년의 삶을 은은하게 반겨주었으며 아침에 눈을 떠야 할 선명한 가치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당사자들이 아무리 세상 사람들에게 무관심하더라도 둘의 만남은 수군대기 딱 좋은 비밀이 된다. 분별력도 없는 노인들이라는 이웃들의 오지랖에, 점잖게 굴기를 바라는 자식들의 참견이 더해진다.
좋아하거나 잘 알지도 못했지. 그런데 바로 그게 내가 지금 좋은 시간을 보내는 요인이란다. 이 나이에 누군가를 알아가는 것, 스스로가 그녀를 좋아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 알고 봤더니 온통 말라죽은 것만은 아님을 발견하는 것 말이다.
"아빠, 이건 옳지 않아요"라는 딸에게 루이스가 해주는 말은 내 가슴을 뻐근하게 한다. 왜 인간은 친밀한 관계라는 이유로 혹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누군가를 말라죽게 하는 걸까. 그런 인간관계들 속에서 묵묵히 버텨온 두 사람이 이젠 몸도 영혼도 말라 비틀어버린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는데 왜 그걸 가만두지 못하는 걸까.
"이 나이에 어떻게"라며 손사래 치는 이에게 "못 할 이유 있어요?"(67p)라고 가볍게 대응하고, "에너지가 부럽군"(29p)이라며 비아냥대는 이의 말은 서로를 북돋아줄 수 있게 "좋은 에너지 보내줄게요."(86p)로 바뀐다. 두 사람은 같이 밥 먹고 산책하고 캠핑과 여행을 가고 축제와 공연을 즐긴다. 함께하는 일상을 보내며 "더는 불가능할 만큼 행복"(171p)을 느낀다.
우리 둘 다 인생이 제대로 뜻대로 살아지지 않은 거네요.
그래도 지금은, 이 순간은, 그냥 좋네요.
뜻대로 살아지지 못한 인생을 거쳐 살만큼 산 노년의 나머지 삶은 이제 살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둘 것 같지만 두 사람에게 기다렸다는 듯이 위기가 찾아온다. 다른 건 몰라도 6살 된 손자 제이미를 잃지 않으려고 루이스와 멀어지는 애디. 왜 모든 건 변할 수밖에 없는 걸까? 제발 변함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은 인간의 부질없는 욕심인 걸까. "우리는, 당신과 나는, 어찌 될까요?"(121p) 애디의 물음에 마음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존재의 이별은 친밀감의 상실이자 외로움의 늪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둘 사이에 연결된 끈이 끊어져 또다시 혼자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공허함이 숨 막히게 조여 온다.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의 삶을 고쳐줄 수 없다. 고칠 수 있는 건 자신 밖에 없을 텐데 그마저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 아프고 슬프다.
지금 가요?
밤이 아직 몇 시간 더 남았어요.
두 사람의 만남은 "습관과 쓸쓸함, 그리고 예감된 외로움과 낙심"(180p)으로 서서히 변해갔고 결국 물리적인 어둠에 영혼의 깜깜한 밤이 뒤덮인다. 헤어짐의 끝자락을 붙들고 있는 건 무엇일까. 그 너머는 칠흑이었고 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