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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 Jan 20. 2024

인간을 배신하는 글쓰기

기억에 대한 단조로운 글이 내게로 왔다

『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1984Books


프랑스어 원제는 La place '자리', 그건 사람이나 물체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 혹은 사람의 몸이나 물건이 어떤 변화를 겪고 난 후 남은 흔적이다. 아니 에르노는 역사적인 사실에 자신의 내외적인 경험을 결합하고 개인적인 것을 사회적인 것으로 확장시키는 작품을 써왔다. 그리고 이 자전적 소설을 통해 아버지의 자리를 돌아보며 '기억'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기억'하고 글로 옮겨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아버지와 그의 인생에 대해 그리고 사춘기 시절 그와 나 사이에 찾아온 거리에 대해 말하고 쓰고 싶었다. 계층 간의 거리나 이름이 없는 특별한 거리에 대해. 마치 이별한 사랑처럼. (19p)


책의 내용은 작가가 중등교원 자격 실기 시험을 합격하고 정확히 두 달 후에 발생한 아버지의 죽음에서부터 시작한다. 어머니는 "그거 아니? 아버지는 멋진 남자였어, 젊었을 때 말이야."라고 말하지만 시신에는 "썩은 물이 고인 화병에 버려둔 꽃에서 나는 은은하고도 끔찍한 냄새"(14p)가 났고, 장례식에 참석한 남편은 "자신의 것이 아닌 슬픔에 불편해 보였다."(16p) 죽은 자에 대한 애도의 시간은 산자의 무신경함과 죽음에 관련된 온갖 형식적이고 통상적인 절차를 수반한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끝내고 돌아온 어느 여름날, 첫 발령을 기다리고 있던 작가에게 "이 모든 것을 설명해야만 한다"는 생각(19p)이 갑자기 찾아온다.


그러나 자신과 타인의 일생을 기록하는 일은 전적으로 '기억'에 의존하기 마련. 회고를 한다는 건 기억 속 무의식을 마구잡이로 뒤지는 일일 텐데, 인간에게는 기억 이면에 망각이 있다. 우리는 그 경계선에 서서 없던 일을 있는 것으로 (아님 반대로) 만들거나 나의 감정을 고집스럽게 믿고 강요하기도 한다. 끄집어내고 들춰내어 기억의 파문은 점점 퍼져가지만 겹겹이 포개진 동심원 중 무엇이 진실의 원인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함에 빠져버리고 만다.


최근에서야 나는 소설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질적 필요에 굴복하는 삶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술적인 것, 무언가《흥미진진한 것》혹은《감동적인 것》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 시처럼 쓴 추억도 환희에 찬 조롱도 없을 것이다. 단조로운 글이 자연스럽게 내게 온다. (20p)


작가는 자신이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는 공백에 어떤 상상도 더하지 않는다. 감정 폭탄을 터트려 눈물범벅으로 만들지도 인물을 감동적으로 미화하거나 상황을 흥미진진하게 각색하지 않는다. 시적 감흥을 받아 아름답게 노래하거나 여백의 미로 함축하지 않고 어떤 평가나 판단도 없다. 그저 당시의 생활방식과 관습, 계층 간 차이에서 엿볼 수 있는 "한 존재의 모든 객관적인 표적"(20p)을 모아 설명할 뿐이다. 꼭 필요한 단어와 문장으로 기술하는 것이 작가가 말하는 기억의 방식이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읽지도 쓰지도 못하면서 자식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 아집을 가진 농장 짐수레꾼이었고 할머니는 품위가 있지만 삶에 대한 비관과 우울에 시달렸다. 활발한 성격에 장난기가 있고 건실했던 아버지는 농장 일꾼을 하다가 군대를 다녀온 후 공장 노동자로 살아간다. 공장에서 만나 결혼한 어머니는 유행을 쫓는 멋쟁이에 아주 다부진 사람이었지만 사랑을 부끄럽게 생각해 부부 사이가 그다지 다정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부지런히 돈을 모으고 대출을 받아 카페 겸 식료품점을 차렸다.


나는 천천히 쓰고 있다. 사실과 선택의 집합에서 한 인생을 잘 나타내는 실타래를 밝혀내기 위해 애쓰면서. 조금씩 아버지만의 특별한 모습을 잃어가는 듯한 기분이다. (...) 단어와 문장에 최대한 가깝게 써야 하는 이런 작업에서 글쓰기의 행복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 그저 그 단어와 문장이 아버지가 살았던 세계이자 내가 살았던 세계이기도 한 곳의 한계와 색깔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40p)


작가는 2차세계대전이 온 세상을 휩쓰는 시기에도 살아내야만 했던 삶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결핍을 헤아릴 수 있는 장면(45p)들과 그녀가 살던 환경의 수치스런 장벽들(48p), "간신히 얻게 된 여유로운 생활"(51p)과 아버지가 드러내는 "열등의 표식"(55p), "어쨌든 저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말하게 하는 모든 것들"(68p)을 떠올려 글로 쓴다. "단순하고 하찮은 혹은 용감한 사람들의 부류에 들어가는"(71p) 아버지가 "점점 더 삶을 사랑하게"(89p) 되고 "세상으로부터 멀어져"(96p) 가던 순간을 회상하며 차근차근 문장으로 옮긴다.   


부모님을 떠나 '모던하고 부유한' 부르주아의 세상으로 들어간 작가는 '마치 이별한 사랑처럼' 그들의 삶으로부터 분리되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살던 세계의 방식과 생각, 취향을 이미 잊었다고 생각하지만 기억은 저항을 했고 어렴풋한 추억에 기대어 글을 쓸 수도 없었다.


그는 나를 자전거에 태워 학교까지 데려다주곤 했다. 비가 와도, 해가 쩅쨍해도, 두 강 사이를 건너는 뱃사공이었다. (100p)


이제 아무것도 쓸 말이 없을 것 같다고 하던 작가는 결국 "울고 싶은 감정"(101p)을 드러내고야 만다. 전혀 다른 두 세계를 딸이 온전하게 건널 수 있게 도와준 뱃사공 아버지, 자신을 멸시하는 세상에 딸이 속해 있다는 사실이 커다란 자부심이었고 존재 이유였던 아버지를 재인식한 순간 작가는 '한계의 경험'을 하고 만다. '한 존재의 객관적인 표적'에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아버지의 모습이 깃들어 있었고, 그건 우리 모두의 아버지일 수 있다는 걸 알아챈 나도 그만 울컥하고 만다.


나는 감히 이렇게 설명해보려 한다.
글쓰기란 우리가 배신했을 때 쓸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라고
-장 주네


나는 책을 펼치면 제사(題詞 : 책의 첫머리에 그 책과 관계되는 노래나 시를 적은 글)에 담긴 작가의 의도를 찬찬히 생각해 보는 편이다. 한 줄 문장에서 비롯된 작가의 생각이 어떻게 글로 형상화되었는지 짐작해 본다. 책을 읽은 후엔 작품 해설 (또는 옮긴이의 말)을 읽으며 나의 감상과 비교해 보고 미쳐 놓친 부분을 체크한다. 이 책의 제사는 장 주네의 문장이었고 옮긴이의 말에 그것과 관련된 문구가 있었다. 1984년 아니 에르노가 이 책으로 르노도 상을 받았을 때의 인터뷰 글이다.


"아버지의 존재로 소설을 쓰는 것은 일종의 배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소설을 쓰면 인물을 창조하게 됩니다. 이 경우는 제 아버지가 되겠죠. 나는 아버지의 초상화를 그렸을 겁니다. 분명 그를 미화하겠죠. 많은 것들을 미화했을 거예요. 마치 내가 아직 거기 있는 것처럼. 그러나 그런 것들은 아버지의 삶을 전혀 나타내고 있지 않아요."


어쩌면 기억은 픽션일지도. 그런 까닭에 아니 에르노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 단조로운 글쓰기를 시도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문학적인 삶이 아니라 인간적인 삶을 원했고 그것만이 아버지의 불투명한 삶을 밝히는 선택이라 믿었다. 그리고 기억의 파편들을 모아 기억 그 자체보다 더 큰 무언가를 이뤄냈다.


그 누군가와 나를 '배신'하며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 꾸밈과 덧붙임이 없는 투명한 글쓰기가 문학이 할 수 있는 전부이자 의도하지 않았던 감동마저 불러온다는 진심을 알아버린 나는 미완의 기억에서 무엇을 길어 올리고 사람의 자리를 어떤 방식으로 것인지 천천히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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