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주 Feb 17. 2024

따스한 영혼이 내 곁에 살포시 내려앉을 때

나는 잃었던 사랑을 다시 찾는다

『그리운 메이 아줌마』 신시아 라일런트, 사계절


나 혹은 누군가의 죽음이 예고되어 있을 때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을 듣는다. 준비라는 건 미리 갖추어 두는 일일 텐데 눈앞의 죽음이 집어삼킬 듯이 노려보고 있을 때 나는 어떤 마음이 되어 무슨 준비를 할 수 있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또한 죽어가는 이를 옆에서 지켜보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을 때 어떻게 준비해야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헤어짐을 맞을 수 있을지 헤아려보는 것도 여전히 어렵다. 그러나 마음의 준비가 하나도 안 되었는데 사랑하는 이를 하루아침에 잃는다는 건 어떤 기분인지 이미 알고 있다.


매일 공원으로 새벽 운동을 가던 아빠가 집에 돌아온 뒤 화장실 바닥에 쓰러지셨다. 넘어지면서 머리에 충격을 받고 의식이 없던 아빠는 응급실에 간지 얼마되지 않아 돌아가셨다. 서울에 있는 나에게 연락이 왔을 때는 임종도 놓친 상황이었다. 그렇게 나는 마음의 준비도 없이 깊고 어두운 물속에 빠져 버렸다. 사랑하는 이에게 한 마디 인사도 하지 못했다는 괴로움과 갑자기 뻗어온 죽음의 손아귀에 소중한 무엇을 빼앗겨버렸다는 상실감, 살아생전에 잘해드리지 못했다는 죄책감, 홀로 남겨진 엄마가 삶의 의욕을 잃고 멍하니 앉아 계신 모습을 보면서 헤어날 길 없는 슬픔을 느꼈다. 




메이 아줌마는 밭에서 돌아가셨다. 떠나기 직전까지 아줌마는 정겨운 밭에 사랑스러운 채소들 사이에 있었다. 어쩌면 아줌마는 편안하고 행복하게 눈을 감으셨을지도 모르지만 어떤 마음의 준비도 없이 아내를 잃은 오브 아저씨는 몇 달 몇 날 째 슬픔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이도 많고 몸도 성치 않은 아저씨는 입맛을 잃고 어린 서머를 돌보는 일에 무심해졌으며 왜 계속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잊은 채 일상을 통째로 어둠에 가둬버린다.


나이가 지긋이 들어서도 서로를 애틋하게 챙기던 부부. 여섯 살이던 서머는 오브 아저씨가 부엌에 앉아 메이 아줌마의 길고 노란 머리를 땋아주는 모습을 보며 행복에 겨워 울었다. 그건 서로를 아끼며 사랑하는 이들의 모습임에 분명했으니까.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이 부드러운 손길이 되어 머물고 따뜻한 시선이 닿는 곳에 사랑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서머는 알고 있었다. 엄마에게서 받은 넉넉한 사랑 덕분에 자신이 더 큰 사랑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과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진실되게 사랑을 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엄마가 죽고 고아가 된 서머는 이모나 삼촌들 중 누구도 맡으려 하지 않아 이 집 저 집을 전전하고 있던 중 친척을 만나러 온 아저씨 아줌마 눈에 띄었다. 주눅이 잔뜩 든 어린 천사의 모습을 안쓰럽게 여긴 아줌마와 아저씨는 오갈 데 없는 아이의 손을 잡아 집으로 데리고 간다. 집이라고 해봤자 외딴 산자락에 있는 낡고 녹슨 트레일러였지만 서머는 그곳을 세상에 다시없을 천국이라고 생각한다. 집안을 가득 채운 아저씨의 바람개비가 눈앞에서 빙글빙글 춤을 추는 걸 보며 자신이 선택받은 아이가 되었다는 기분에 행복했고 아줌마의 찬장과 냉장고에 자기를 위한 맛있는 음식들이 가득 채워진 걸 보고 벅찬 사랑을 느낀다.


메이 아줌마에게도 아프고 슬픈 과거가 있었지만 아줌마는 운명을 탓하지도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했으며 누가 어떤 행동을 하든 간섭하지 않고 믿어주었다. 아줌마는 오직 사람들의 가장 좋은 면만 보려고 했다. 그런 아줌마를 서머는 오직 사랑뿐인 커다란 통 같다고 회상한다. 서로를 꼭 붙들고 의지하며 살아야 된다고 말하던 아줌마였건만 그녀의 빈자리, 그 존재의 부재는 아줌마가 머물던 공간, 함께 했던 시간들 안에서 더욱 큰 상실과 결핍이 되어 아저씨를 덮쳤고 아저씨마저 떠나버릴 위험에 처하게 만든다. 


아줌마를 너무나 아끼고 사랑했던 아저씨였지만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아저씨의 마음은 갈수록 공허해졌고 몸은 허약해졌으며 자디잘게 찢어진 마음은 치유될 길이 없어 보였다. 사람의 육체는 사라져도 영혼은 존재한다고 믿는 아저씨는 공기와 바람, 모든 곳에서 아줌마의 숨결을 느끼려 한다. 그건 아저씨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한 따스한 기억들만 있으면 몸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것이었기에 서머의 마음은 고통과 슬픔으로 갈가리 찢어진다.


죽음은 어떤 얼굴로 찾아올지, 가까이 다가온 죽음의 차가운 손을 잡을 그 순간은 항상 두렵다. 아니 죽음보다 더 두려운 건 사랑하는 이들과의 헤어짐일 테다. 내가 떠나보내야 할 이들, 내가 두고 가야 할 이들, 그 많은 작별들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더 이상 살고 싶어 하지 않던 오브 아저씨의 마음에 다시 살고자 하는 희망의 불씨를 심어준 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메이 아줌마의 다정한 영혼이 아저씨에게 속삭이지 않았을까. 나는 여기 당신 곁에 있다고, 언제나 언제까지나 함께 할 거라고. 


누구도 자기의 생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른다. 마음의 준비조차 아까운 이 순간순간들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자신을 잘 돌보고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온마음으로 사랑하는 일이리라 믿는다. 나의 말이 맞다며 아빠의 따스한 영혼이 내 곁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영혼의 소리가 담고 있는 진정한 사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생의 슬픔에 잠긴 우리에게 위안을 주려 하나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