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주 Feb 10. 2024

사랑받았다고 느꼈으면 좋겠어요

내 삶의 모든 다정한 색

「삶의 모든 색」 리사 아이사토, 길벗어린이

아이의 삶


무더운 여름 한바탕 폭우는 아이의 놀이를 망치는 방해꾼이 아니었습니다. 발그스름한 작은 몸 위로 쏟아지는 하늘물줄기는 뜨거운 목마름을 해소하는 천연의 폭포수였습니다. 늦도록 환한 여름 오후의 들꽃 향기는 유년의 한 면에 달고 끈끈한 감촉을 남기고 살갗을 간지럽히는 말랑한 바람과 새콤한 햇살이 아이의 기억 속에 흘러넘칩니다. 소복소복 함박눈이 내리면 아이의 뺨은 포옥 잘 익은 홍시가 되고 '호오'하며 공중으로 흩뿌린 무색투명한 입김은 차가운 공기에 새하얀 하트를 그립니다. 아이의 하루하루는 설렘으로 신비롭게 채워지고, 호기심 범벅의 천진한 물음은 책의 숲을 거닐다가 새로운 세계에 가닿습니다. 작은 몸은 여려서 곧잘 상처를 입고 때로는 불공평한 세상과 맞서 싸우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 시절에 사랑받았다고 느꼈으면 좋겠어요.



소년의 삶


어느덧 아이는 소년이 되고 천방지축의 삶은 서서히 막을 내립니다. 잔뜩 멋이 들어 외모를 꾸미느라 바쁘고 관심사가 옷이나 향수에 쏠리기도 합니다. 학창 시절은 저 높은 곳에 오르려는 치열한 경쟁의 각축전이 되고 소년은 험난한 갈등에 몸부림을 치다가 거친 질풍노도에 휩쓸려 속절없이 떠내려갑니다. 혼돈의 시기에 삶의 방향을 바로잡아 줄 어른을 만나기도 하지만 사춘기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어른들의 불안과 걱정을 불러옵니다. 부모를 향한 폭발적인 반항과 결핍이 무관심과 애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지만 언젠가 당당하게 땅을 박차고 오를 그날을 반짝이는 눈동자에 담아 노래합니다.


당신이 당신의 날개로 훨훨 날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자기의 삶


주변에 있는 이들 모두가 목청껏 합창을 하지만 나만 노래의 가사를 모른다는 기분, 어느 것이 내 길인지 확신이 들지 않는 느낌이 엄습합니다. 소년은 몸이 자랐지만 자기의 삶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릅니다. 어른이 되면 불행 끝, 행복 시작일 거라는 짐작은 섣부른 판단이었음을 깨닫고 사방팔방으로 뚫린 갈림길 앞에서 또는 꽉 막힌 막다른 길 위에 서서 선택의 고민은 깊어져 갑니다. 지금이 인생에서 제일 좋은 날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방황의 늪에서 허우적 발버둥을 치고 눈먼 사랑꾼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힘은 위대했습니다. 드디어 자신의 반쪽을 찾았다는 안도감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지요. 흠뻑 젖는 거센 장대비에도 보송보송한 숨결과 반짝이는 두 눈이 합쳐져 어떤 곤경이라도 헤치고 나갈 튼튼하고 매끈한 마음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곧 일상이 시작되면 두 사람은 보폭을 맞추어 걸어야 해요.



부모의 삶


마음에도 유통기간이 있을까요?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현실이 눈앞에 버젓이 펼쳐집니다. 혼자가 둘이 되고 셋, 넷이 되는 과정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은 부모의 삶에 힘든 아침과 낮, 밤이 연이어 기다리고 있지만 내가 자초한 일이기에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는 시간의 연속입니다. 처음 만나는 자신의 낯선 얼굴을 보고 당황했다가 시간에 쫓겨 갈팡질팡하다가 혼자가 되는 자유를 미친 듯이 갈망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 싶은 순간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곁에 있을 때. 그 존재와 함께하는 아깝지 않은 시간들이 나를 온전하게 만들어 줍니다.


지금처럼 사랑으로 가득했던 적은 없어요.



 어른의 삶


이만하면 잘 달려왔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이제서야 겨우 알게 되었는데, 한시름 놓을까 싶은 순간에 세상이 다르게 보입니다. 여름날 빗속에서 놀던 아이, 눈이 부시도록 여름을 수놓던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나요? 퐁퐁 샘솟던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갔나요? 참다운 나를 찾는 시간은 끝이 없어 보이고, 강하다고 느꼈던 심신은 쇠락으로 치닫습니다. 하나 둘 작별 인사를 하며 곁을 떠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어리둥절하다가 문득 삶이 너무나 조용하다는 적막감을 느낍니다. 늙음의 시간은 상실과 고독, 망각의 호수가 되어 홀로 노를 젓고 있는 나를 바라보게 합니다.


어느새 우리도 늙어가지요.



기나긴 삶


청춘은 다했습니다. 꽃다운 시절이 저뭅니다. 마음은 아직 스물두 살이라 말하고, 하고 싶은 일이 여전히 많지만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며 시간은 더 이상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젊은 시절에 미뤄두었던 일들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은퇴의 시간이 찾아왔지만 세상은 낯선 두려움의 산더미가 되어 앞을 가로막습니다.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말할 수 없는 든든함이 되고, 서로를 의지하며 곧 다가올 긴긴 시간을 받아들여야 할 시기입니다. 모든 작별과 상실 이후 내 삶의 모든 색을 고스란히 담아 나는 돌아가야 합니다. 내가 왔던 그곳으로.


삶의 모든 순간, 당신이 사랑받았다고 느꼈으면 좋겠어요.




<삶의 모든 색>에는 ‘아이의 삶’, ‘소년의 삶’, ‘자기의 삶’, ‘부모의 삶’, ‘어른의 삶’, ‘기나긴 삶’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집니다. 모든 순간은 찰나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순식간에 지났기에 아련합니다. 내 삶의 장면은 어떤 순간도 흐릿한 흑백이 아니라 생생한 컬러였다고 말해줍니다. 빛과 어둠, 낭만과 번뇌, 기대과 후회, 보람과 좌절, 상실과 외로움, 기쁨과 슬픔, 사랑과 우정이 있던 그 모든 순간 나는 나만의 색으로 사랑받았음을 느낍니다. 수없이 다양한 색과 형태를 가진 그대의 삶도 온기 어린 다정한 사랑으로 언제나 가득 차오르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전 10화 허기진 퇴각이 온다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