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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 Feb 16. 2024

발끈한 사자 머리

그러나 그녀들이 있어서 행복했다

2001년 밀레니엄 시대가 찬란하게 막을 열던 당시는 바야흐로 daum 카페 전성시대이기도 했다. 그때 나는 서울에 있는 IT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연고도 없이 상경해 남영동 숙대 앞에서 하숙을 하다가 구로에 있는 근로자 아파트에서 살게 되었다. 일가친척은 물론이고 아는 선후배, 친구 하나 없이 그저 회사 동료들이나 아웃소싱 업체 직원들과 어울려 퇴근 후 기울이는 한 잔 술로 각박한 사회생활의 시름을 달래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맛있는 안주와 시원한 생맥주를 유일한 낙으로 삼아 다람쥐 쳇바퀴 돌듯 회사와 집, 집과 회사를 오가던 어느 날 출근길 지옥철 안에서 나는 생각했다. 삶이 참 지난하고 별거 없다고. 활력소가 될 변화, 무엇보다 또래 친구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나는 업무를 미루고 daum 카페에 접속했다. 수많은 동호회로 범람하는 그곳을 한참 헤매며 검색과 고민을 거듭한 끝에 하나를 선택했고 그렇게 일사천리로 정모까지 나가게 된 게 73소띠 동호회였다.


요즘이야 혼밥, 혼술이 트렌드가 되고 뭐든 혼자 당당하게 할 수 있는 세상이라지만 그때는 나 혼자 뭘 한다는 건 그야말로 뻘쭘의 극치였다. 넉살도 주변머리도 있을 리 만무한 지방 처자였던 나는 오로지 서울 친구를 만들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어색하고 무안한 첫 만남의 고비를 넘겼다. 흥청망청 파티 같은 연말 정모와 몇 번의 즉흥적인 번개 만남을 갖고 나니 내 주변에도 어여쁜 친구들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이것 참 재미있는 사교 모임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건 오프라인에서도 서로를 실명이 아닌 닉네임으로 부른다는 점과 학교, 직장, 고향, 취미, 취향 뭐 하나 공통점이라곤 없는 사람들이 모여 너무나 쉽게 마음을 터놓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였다. 나는 죽이 잘 맞는 몇몇 친구들과 소무리를 이룰 정도로 급속히 친해졌고 순식간에 빠져들어 소친구들 없는 나의 일상은 상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모임을 나갈수록 또 약간 신묘했던 건 남자 회원들과의 기류였다. 동갑이지만 어릴 때부터 알던 친구도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매일 봐야 하는 직장 동료도 아닌 그들 주변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은근한 사심들과 짜릿한 전기가 흐르고 있었다. 썸을 타며 사랑의 줄다리기를 밀고 당기고 화려한 밤의 축포를 쏘아 올리는 그들은 역시 나와는 다르게 우정보다는 사랑을 쫓고 있었다. 꿩 먹고 알 먹고, 도랑치고 가제 잡고, 임도 보고 뽕도 따는 셈인가. 눈치 없고 숫기 없던 나 역시 괜스레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는, 멋을 안 부리려야 안 부릴 수 없던 부늬기였던 것이었다.


아기다리고 고기다리던 정모날이 밝았다. 나는 화장이 들뜨지 않게 기초화장 마지막에 유분 크림을 추가했다. 피부 톤은 최대한 칙칙해 보이지 않도록 커버력이 탁월하고 광택을 뿜는 발림성 좋은 21호 파운데이션을 선택했다. 유행하는 연보라 아이섀도를 쌍꺼풀 라인에 옅게 칠했다. 아이라인은 가늘게 그리다가 눈꼬리를 살짝 꺾어 눈매가 선명해 보이게 했다. 라식수술을 한 이후 안구건조증이 심해서 마스카라는 생략하고 뷰러만 몇 번 찝었다. 눈 밑에 하얀 펄을 살며시 묻혀 귀여운 애교 살을 도톰하게 강조하고, 얼굴 면적은 작아 보이도록 살구빛 볼 터치를 탁탁 두드렸다. 입술에는 반짝반짝 윤기가 도는 갈치색 립스틱을 발라 화장을 완성했다.


다음은 헤어였다. 내 머리는 숱이 많고 반곱슬이기에 손이 많이 갔다. 드라이기가 탐탁지 않아 고데기를 사용했는데 아무리 해도 머릿결이 찰랑찰랑 탱탱하게 살지 않았다. 오히려 두발에서 수분기가 빠져 부스스함만 더해지는 기분이었다. 난감했지만 얼굴 화장에 한 시간이나 잡아먹었던 터라 머리 스타일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 에센스를 바르고 미스트를 뿌려 적당히 마무리했다.


모임 장소에 도착한 나는 일단 화장실에 들러 거울을 보며 마지막 점검을 하고서야 친구들과 합석했다. 오랜만에 여자애들, 남자애들 전부 모이는 정모여서 더 왁자지껄 정신이 없었다. 친한 친구들은 나를 보며 손을 흔들고 한 마디씩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안주는 근사했고 술은 달았다. 재돌이(닉네임)의 그 태연스러운 그 한 마디가 있기 전까지는 말이었다.


"무스야, 근데 너 오늘 가발 썼냐?" (나의 닉네임은 발음도 멋들어진 무쓰쇼콜라이건만 이넘은 맨날 무스라 불러)


'뭐라! 이 자슥이. 면상에 무스를 확 발라버릴까 보다' 부르르 주먹이 울었지만 미를 향한 여자의 대쪽 같은 자존심을 뭉개 버릴 수 없다는 생각에 애써 눈부신 미소를 지었다.


"흥, 넌 미스코리아 스타일도 모르는구나? 이거슨 얼굴에 자신 있는 사람들만 한다는 바로 그 사자 머리 아니겠냐!"


잘생긴 그 녀석 재돌이 옆에 바짝 붙어 앉아 부어라 마셔라 얼큰하게 취해있는 촬랑촬랑 긴 생머리의 아리따운 떨리미는 모임이 있는 날이면 항상 사전 연락이 안 되곤 했는데 알고 보니 늘 미용실에 들렀다가 온다는 후문이 들렸다. 그래 더더 예쁘게, 아무렴 한 번뿐인 인생인데 예뻐야지. 나는 알흠답지만 질퍽한 곳에 발을 내디딘 기분이 잠시 들다가 왜 이렇게 예뻐졌냐는 여자친구의 말에 쭈욱 행복해졌다. 



* 예쁨: 행동이나 동작이 보기에 사랑스럽거나 귀엽다. 누군가에게로 향하는 마음은 얼굴이 아니라 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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