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사랑해요." 그 말을 처음 듣던 순간을 어찌 잊으랴.
서른 중반 첫아이를 출산하기 직전까지의 내 직업은 온라인 의학 전문지 편집 기자였다. 임신을 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수년간 누적되어 온 출퇴근 환승과 지옥철의 무한반복 일상은 매일 토할 듯 끔찍하게 여겨졌으며 하루가 멀다 하고 당연시되던 야근은 두통과 소화불량을 달고 사는 지긋지긋함으로 다가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김없이 밝아오는 아침마다 칼같이 일어나 비몽사몽 어딘가로 향해야 한다는 출근 압박감은 몸서리쳐지게 싫었다. 늦은 나이에 아이를 낳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이제 다시는 나인투나잇 직장인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였다.
늦게 결혼해 두 아이를 낳고 기르는 동안 사실상 경력은 단절되었다. 뭔가 해봐야 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건 둘째가 어린이집을 다닐 무렵이었다. 일단 시간에 여유가 생겼고 외벌이 남편의 수입만으로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따랐다. 아이들을 어린이집과 학교에 보내놓고 서울을 오가며 힘든 줄도 모르고 관련 수업을 들었다. 이수을 하고 나서 여러 개의 자격증을 취득하면서 노력을 하자 운이 뒤따랐다. 초짜에게는 기회를 주는 학교가 없어서 낙담을 거듭하고 있을 때 지원도 하지 않았던 한 초등학교에서 교육지원청 누리집에 있는 나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보고 연락을 주셨다. 그날부터 나는 방과후 선생님이 되었고 내 아이가 아닌 다른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그토록 즐거운 일인지 새삼 깨달으며 살게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밖에 볼 수 없는 아이들이었지만 매 순간 열의를 다하며 친절함을 잃지 않았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한 아이가 있다. 순박한 얼굴을 한 조용한 성격의 그 아이가 어느 날 환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보더니 "선생님은 이뻐요."라고 말했다. 살면서 이쁘다는 말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만큼만 들었던 나는 깜짝 놀라 "어? 내가 왜 예뻐?"라고 물었고 되돌아온 그 아이의 대답은,
"화내지 않고 늘 웃어서 이뻐요."
아! 아이들 마음은 이렇구나. 이목구비 얼굴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자기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전체적인 태도와 인상을 보는구나, 아니 그 너머의 마음을 보는구나. 예쁘다는 말은 남녀 모두에게 쓸 수 있는데 내가 보기에 상대가 좋아 보이고 흐뭇함을 자아낼 때 즉, 눈에 보이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온전히 느껴져야 쓸 수 있는 말이었다. 말로 나를 감탄하게 했던 그 아이가 다른 날엔 글을 남겼다.
"선생님, 사랑해요."라고.
그날 이후 난 모든 아이들에게 예쁨을 받는 선생님은 아니었지만 잊을만하면 사랑의 메시지를 받았고 그럴 때마다 마음을 다잡았다. 해가 거듭되어 경력이 쌓일수록 허술해지는 자세와 해이해지는 마음을 놓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이 늘어갔다. 내가 기울이는 하루 잠깐의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아이들에게 소중하고 가치 있는 순간들이 될 수 있게끔 스스로 부단히 공부하고 성장해야겠다는 생각도 거듭되었다.
"선생님, 보고 싶었어요.", "저도 한 번 안아봐요."라며 다가오는 아이들, "저 오늘 학교 와서 선생님 수업 있는 날인 줄 알고 소리 질렀어요. 너무 좋아서요.", "저도요. 맨날 기다려요."라는 말들, 녹음을 해 놓고 힘 빠질 때마다 들어줘야 하는 말들과 웃으며 반겨주는 아이들이 고마운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선생님이란 타이틀을 얻은 게 무안한 만큼 너무나 귀한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한동안 나는 왜 보따리장수인 강사가 아닌 늘공(늘 공무원) 선생님을 꿈꾸며 도전하지 않았을까 후회막심도 하고 수입에 대한 욕심도 부렸지만 이제는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만족한다. 대단한 꿈을 이루진 못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현재의 삶이 기껍다. 한결같은 가족의 도움과 지지하에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며 살기에 행복하다. 그렇게 감사하며 가볍게 마음을 비워서일까. 올해는 그 어느 해보다 큰 행운이 찾아와 다섯 학교에서 수업을 하게 되었다. 천천히 여유를 즐기며 보내던 시간들을 옆으로 살짝 밀어 두고 바쁘고 보람 있게 살 한 해가 벅찬 기대로 다가온다.
그리고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기대하지 않았던 길운도 내게 손을 내밀었다. 3년 전에 썼었던 160여개의 글들 중에서 30편을 추려 얼마전에 발행해 두었던 브런치북 「사소한 잡화상 ; 잡담. 화답. 상상」에 출간 제안이 들어온 것이다. 부끄럽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글들이 쓸모 있다는 건 영광스러운 일이다. 물론 아직은 너무나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글들이고 책이 된 내 글이 무관심 속에 사장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크기에 출판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반기획이라는 부담도 있었다. 글을 잘 쓰는 작가님들은 일상다반사로 받는 제안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전자책이든 종이책이든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여지는 글을 쓰는 데 있어 굉장히 고무적인 영향을 끼친다.
앞으로 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예쁜 아이의 입에서 흘러나왔던 그 말을 나는 이제 내가 가르칠 다른 아이들에게 그리고 나의 일과 글, 브런치와 여러 작가님들에게 부메랑으로 되돌려 보낸다.
"모두, 사랑해요!"라고.
나는 계속해서 일하고 꾸준히 쓸 것이다. 그 끝에 뭐가 있을지 두근두근한다.
+《브런치북》
- 잡담 #이런나라도괜찮다면 https://brunch.co.kr/brunchbook/yuju-chapter1
- 화답 #안단테걸음아다지오마음 https://brunch.co.kr/brunchbook/yuju-chapter2
- 상상 #어쩌다책과함께칸타빌레 https://brunch.co.kr/brunchbook/yuju-chapter3
위 연재들은 공히 15화로 끝맺음을 합니다.
세 개의 브런치북은 「사소한 잡화상 ; 잡담. 화답. 상상」 시즌2로 묶을 생각이고요.
3월 새 학기 수업들에 적응 시간을 잠시 가진 후에 「사소한 잡화상 ; 잡담. 화답. 상상」 시즌3 연재로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