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개의 말로도 내 진짜 감정 하나를 붙잡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림은 나에게 말이 아니라 '느낌'으로 다가섭니다. 그림 앞에 서면 나의 내면이 그 어느 때보다 솔직하게 드러나는 이유입니다.
김선현 <그림의 힘>
그림에 문외한임에도 그림이 좋다. 자주 보고 읽는다. 읽는다는 표현이 생소한가 싶어 덧붙이자면, '보다'라는 말은 대상을 즐기고 감상한다는 뜻이 있는 반면 '읽다'에는 그것이 전하는 내용이나 뜻을 헤아려 안다는 의미가 비유적으로 담겨있다. 즉 나는 내 나름의 시선으로 그림을 훑으며 주관적인 느낌대로 미루어 해석하기를 즐긴다.
<그림의 힘> 저자 김선현의 말에 공감하는 바, 내가 그림을 보는 방식은 작가나 작품에 대한 배경지식을 중요시 여기거나 미술 전문가적인 관점으로 이해하는 데 있지 않다. 물론 더 잘 알기 위해 그런 쪽도 궁금해 찾아보는 편이지만, 시작은 '느낌 우선주의'로 먼저 다가간다. 내 감정을 이입하고 기분 내키는 식으로 내면의 대화를 시도하는 스타일이다.
지난 글에서 그리스 신화 속 이카루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앙리 마티스의 <이카루스>가 떠올라 다시 들여다보았다. 야수파 거장인 마티스의 1946년 작품으로 색종이를 오려 붙인 콜라주 기법이 사용되었다. 아마 이 정도는 어린아이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단순하고 쉬워 보인다는 무지한 생각도 든다. 그림 가운데를 꽉 채운 인물과 주변의 노란색 별 모양은 종이를 붙였으며 파란 바탕은 과슈란 채색 기법이 사용되었다.
인물은 춤을 추고 있는 걸까? 이 그림을 처음 보는 아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가슴에 빨간 보석을 단 사람이 별빛 아래에서 춤을 추는 중이라고. 하지만 제목을 알고 있다면 신화와 연결 지으리라. 아버지 다이달로스가 새의 깃털을 모아 만든 날개를 달고 미로를 탈출한 이카루스. 그 해방감과 자유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 새처럼 날아올랐으니 태양의 신 아폴론에게 자랑하고 싶었을 테다. 날개를 붙인 밀랍이 녹지 않도록 태양에 너무 가까이 가지 말라는 아버지의 충고를 잊고 만 이카루스는 끝내 깊고 어두운 바닷속으로 추락한다.
그림 속 이카루스는 새까맣다. 뜨거운 태양열에 타버린 그는 하늘 저 높은 곳에서 율동을 펼치는 모습이다. 아직도 선명하게 빛나는 가슴속 빨간 심장은 한때 그가 하늘을 마음껏 날았고 태양에 가닿았다는 터질 것만 같은 성취감으로 불붙은 듯하다. 그의 이상을 실현시켜 준 날개는 산산이 찢어지고 흩어져 온통 나풀거리고 있지만 마치 조명처럼 그를 사방에서 비추고 있다. 욕심이 지나쳐 못다 이룬 젊은 꿈이 안타깝고 떨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부여잡았을 욕망이 허무하다.
그러나 그림은 슬프지 않다. 왠지 역동적이고 에너지가 가득하다. 순수한 마음으로 느낀 아이들의 생각이 옳았다. 추락에도 이카루스는 희망과 열정을 잃지 않은 채다. 자신의 선택에 후회는 없다고 온몸으로 말한다. 순간의 희열은 생의 전부가 되었을지언정 온 마음으로 불태웠기에 그의 젊음은 아름답고 심장은 영원히 살아있다. 삶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도 그렇지 않을까. 추락은 끝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