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읽는 행위가 조금 더 큰 의미를 갖는 이유는 그 안에서 나의 내적 자아를 반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미술심리치료까지 연계하지 않더라도 그림에 감정이입해 나의 기분과 느낌을 찬찬히 풀어가다 보면 내가 처한 상황과 심리의 한 지점이 엿보인다.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 뭉크의 그림 속 인물들의 표정은 유난히 독특하다. 이는 뭉크의 경험에서 기인한 감정 상태가 반영된 것으로 본다. 뭉크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누나를 결핵으로 잃는다. 슬픔과 가난으로 인해 아버지는 광기의 모습을 보이며 여동생은 정신병 진단을 받고 남동생마저 갑자기 죽는다. 그런 성장 배경 속에 사랑의 감정을 느꼈던 여성은 자유분방한 기질로 그에게 상처와 회한만을 남기고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은 극심한 우울증에 빠지게 한다. 그의 내면의 고통이 그림 <절규>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뭉크 하면 떠오르는 작품이 <절규>이지만 개인적으로 <생의 춤>을 처음 봤을 때 받은 강렬한 느낌을 잊지 못한다. 마치 그림을 삼등분이라도 하듯 세 명의 여성이 일렬횡대로 서있다. 왼쪽에 흰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의상 컬러 때문일까 전체적으로 밝고 온화한 인상이다. 은은한 미소까지 감돌며 여유와 만족감을 품은 모양새다. 그녀 주변에만 꽃이 피어있다는 점에서 그녀가 만끽하는 삶의 향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우측의 여인은 온통 검고 칙칙한 드레스를 입고 두 손을 앞으로 겸허하게 맞잡고 있다. 얼굴 가득 우울하고 슬프다. 뭔가에 단단히 화가 났고 체념과 고뇌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양쪽의 두 여인은 춤을 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함께 출 파트너가 없는 걸까. 의욕이 없거나 굳이 그럴 가치를 못 느끼는 것일 수도 있을 테다. 그럼에도 한쪽은 행복하고 다른 쪽은 불행한 현실이 아이러니하다. 흰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싱싱한 젊음을, 검은 드레스의 여인은 고독한 늙음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
반면 짝이 있는 중앙의 여인은 옆모습이며 정면의 안색을 제대로 예측하기 힘들다. 제일 눈에 띄는 붉은 옷을 입고 한 남성과 춤을 추고 있지만 가면을 쓴 인격처럼 낯빛은 어둡고 눈은 퀭하며 기운이 전혀 없다. 몸은 막대기 마냥 굳은 채 그저 수동적으로 움직일 뿐이다.
이 그림의 제목은 왜 <생의 춤>일까. 세 여자는 우리의 내면 상태와 현재의 처지를 암시한다. 그중에 나는 누구와 비슷한가? 어떤 모습과 닮아있나? 아마 이중의 잣대가 관여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바라는 나 그리고 진짜 나.
삶이라는 정신없이 돌고 도는 춤에 빠져 있는 커플들 뒤로 저 멀리 기둥인 양 분수대 같은 형체가 보인다.
아, 그건 느낌표! 자기 앞의 생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며 솔직하게 인정하고 느껴보라는 뭉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