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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니쌤 Aug 31. 2022

[북 리뷰] 김승호, 《수업이란 무엇인가》

학습의 본질과 수업에서 교사의 역할




오늘날 다양한 이유로 수업을 포기하는 교사들이 많다.


 처음부터 포기하는 교사들이 어디에 있겠는가.

누구나 멋진 수업을 꿈꾸며 교단에 선다.

하지만 발령 후 많은 선생님들에게 있어 멋진 수업의 환상은 오래가지 않는다.


 특히 최근 수업에서 교사의 설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학생 인권의 신장에 따른 교권의 추락, 다양한 사회적 요구,

AI와 기술의 발달, 학습자 중심의 교육 이념 등이 

수업에서 교사의 역할을 점점 줄어들게 만든다.


 교사는 본질적으로 수업과 떨어질 수 없는 존재이다. 

교사가 매일 마주하는 수업이 두려워지는 것은

야구선수가 야구공을 못 던지는 것과 똑같다.

수업 포기로 인한 교사는 

학생이 두려워지고, 학교가 두려워지며,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수업을 포기하는 교사는

아침이면 차라리 깨지 않았으면 하는,

잠들때면 잠들지 않았으면 하는

지옥 같은 하루를 버티며 그저 살아갈 뿐이다.


 수업을 포기하거나, 수업에서 밀려난 교사가

자존감에 상처를 입지 않고 자신이 살기 위해서

어디에 눈을 돌릴 것인가?

승진 또는 각자도생일 뿐이다. 

이는 우리 교육과 문화의 추락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수업을 포기한 교사라도 교단에 있는 한 

언제나 멋진 수업에 대한 열망은 가슴속에 담아 두고 있을 것이다. 

교사를 무너뜨리는 것도 수업이지만,

교사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것도 수업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수업의 본질에 대한 탐구와 

수업 내 교사의 이상적 역할 수행을 통한 자존감 회복이 

우리 교육의 매 순간을 되살릴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다.


 나는 이번 글에서 위에서 언급한 책을 바탕으로


            수업의 본질에 대한 고찰          

            본질적 수업을 위한 교사의 역할          

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 수업의 본질적 의미를 되돌아보고, 

교사의 자존감과 실존을 수업안에서 찾고자 노력해 보고자 한다.




※ 이번 글에서 나온 사고의 흐름 그리고 개념들은 대부분 책의 저자이자 은사이신 김승호 교수님의 가르침이다.

혹여나 책에 잘못된 내용이나 논리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모두 나의 불찰임을 미리 말씀드린다.






수업의 중요성


 수업이 있기 때문에 교사가 존재하며,

수업을 하기 위해서 학교가 존재한다.


 우리 인류의 찬란한 문화와 지식이 

추상적으로 문서에 적혀진 교육과정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들은 궁극적으로 수업을 통해 전수된다.


 아무리 좋은 교육과정이 짜여도 수업으로 구체화되지 않는다면 

인류의 지식과 유산들은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을 것이다.


 즉, 인류의 모든 역사와 문화들이 교사들의 수업을 통해서'만'

학생들에게 제대로 전달될 수 있다.



 물론 이에 대해 인터넷 검색이나 유튜브, 방송 시청 등

문화와 지식을 습득할 방법은 무궁무진하다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이는 후에 글을 읽으며 차근차근 이야기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크게 반박하지 않겠다. 



수업 개선을 위한 노력들


 앞서 말한 수업의 중요성은 

진정으로 교육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이다.


 우리 교육의 여러 분야에서 시도한 개혁 중

특히 수업 개선을 위한 노력은 아주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수업 개선은 교육공학적 연구에만 치중해온 경향이 강하다.


 그동안의 수업 개혁에서 

수업의 근본 목적과 원리 등 본질적인 요소들은 

배제되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단순히 교사의 인식뿐만 아니라 학부모와 학생의 인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결과 눈에 보이는 수업의 요소들에 초점을 맞춰 수업 개선을 해왔다.

예를 들어 깔끔하게 시간을 맞추고, 

각종 시각자료, 영상 자료를 보여주며

완벽하게 계획된 판서 등이 

'좋은 수업'의 기준이 되었다.


 이러한 개혁들은 겉보기엔 좋아 보이지만 

그 속은 부실하기 그지없다.

특히 교육공학적 기법과 자료들을 활용한 수업은 

모든 일상 수업에서 실시할 수 없다. 

이로 인해 특정 시기, 특정일에만 '보여주기'식

수업을 위한 기술 등이 주로 개선되어 왔다.


이에 반해 좋은 수업, 학생의 전인적 성장 등 

교육의 본질적인 목적들은 

비현실적이고 급하지 않은 문제로 여겨졌다.


'현상이 본질을 품고 있다'라는 오류 속에 

교사들은 더 있어 보이는 '가면'을 쓴 

수업에 매달리게 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사들은 이런 보여주기식 

수업에 압박과 허무감을 느꼈다. 

아무리 교사 입장에서 열심히 준비했더라도 

'이게 학생들의 배움에 도움이 될까?'라는 

최초의 의문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학생 중심 수업, 배움 중심 수업 등이

'보여주기식' 수업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다며  

강조되어왔다.


 하지만 학생 중심 수업은 학생 방관 수업이 되어가며

'결과 내기 수업'으로 변해간다.


 교사의 지루한 수업은 피하게 되었지만,

학생들은 자신이 뭔가를 '배웠다, 알게 되었다, 느꼈다'라는

증거물을 제출해야 했다.


  알고 보니 학생 중심 수업은 '보여주기 수업'의 주체가

교사에서 학생으로 넘어간 것뿐이었다.






수업과 학습의 본질적 의미


 이러한 수업 개선 노력들은 모두 수업과 학습의 본질을 놓쳐서 발생한 오류이다.

 먼저 학습의 본질은 무엇인가?


바로 '전인적인 인간 변화'이다.


 학습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그 학생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즉, 오늘날 지식 중심의 평가와 교육에서 중시하는 

무언가를 '안다'는 개념은 

단순히 '단어를 기억한다'가 아니다.


 가르치고자 하는 교육 대상이 

학생의 마음속에 제대로 학습된다면, 

그 학생은 아는 것 이상의 

완전히 본질적인 인격의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다.


 곧, 그 지식에 관한 모든 것이 학생에게 '내면화'되는 현상이 바로 학습의 본질이다.


 성리학에서 말하는 '격물'과 '치지',

피아제가 말하는 '동화'와 조절',

오우크쇼트가 말하는 '정보'와 '판단'

헤르바르트가 말하는 '전심'과 '치사'등 

플라니의 '초점지'와 '자득지'등

학습 이론의 공통점이 바로 

'내면화'를 가리키고 있다.






'내면화' 과정에서 교사의 본질적인 역할에 대하여.


 하지만 학생이 저절로 학습을 일으키는 것은 매우 어렵다.

특히 우리의 교육 대상인 학생들은 아직 학습능력이 부족하다.


 이때 중요한 개념이 

비고츠키의 '스캐폴딩'과 '근접 발달 영역'이다.


 쉽게 말해서 


근접 발달 영역은 학생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도움만 있으면 한 차원 더 높아질 수 있는 상황,

스캐폴딩은 학생이 근접 발달 영역에 도달할 수 있도록 제공하는 언어적 도움, 시범 등이다.


  수업에 대한 오해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때 근접 발달 영역에서 학생에게 스캐폴딩을 하는 주된 방법은 언어 또는 시범이다.

우리 교육, 교사들은 여기에서 많은 한계에 부딪힌다.


 자신에게는 너무 당연한 것을 

내가 학생의 수준과 관심사에 맞추어 

언어로 설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동시에 교사는 이런 스캐폴딩만 제공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교수님은 여기에서 키르키고르의 자아 개념을 통해 

교사의 역할을 강조한다.


 키르키고르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3가지의 자아가 있다.

'심미적 자아', '윤리적 자아','종교적 자아'가 단계적으로 발달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

각각의 실존하는 자아를 볼 때만 학생의 전인적 성장, 자아의 성장이 

이루어질 수 있다.


 쉽게 예를 들어서,

초등학생이 덧셈을 배우고 있다면

덧셈을 막힘없이 잘하는 교사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교육내용의 온전한 전달을 위해서는 실존하는 사람, 곧 교사가 반드시 필요하다.

수업이란 무엇인가 <학지사>, 55p




 물론 교사의 자아와 학습내용이 일치한 상태라면 가장 좋다.

하지만 반드시 고정된 자신의 자아를 통해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

키르케고르 가 생각한 '간접 전달'을 위해서 교사는 다양한 자아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학생에게 간접 전달을 일으키기 전에 교사 자신이 지식을 내면 화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로써 학생과 교사가 모두 성장을 할 때, 진정한 수업과 학습이 이루어질 수 있다.



 물론 이론상으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지만

교과의 모든 내용을 '내면화' 하기란 쉽지 않은 일임을 잘 안다.

또한 이 말은

 '수업 포기의 원인을 교사에게 돌린다'거나

 '당신은 부족한 사람'이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그리고 교학상장이라는 뻔하고 상투적인 말이라는 비판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다만 수업 포기 이전에 지식의 '내면화'를 통해서 

교사 자신이 수업에 더욱 자신감을 가질 수 있고,

동시에 교사 자신도 지식을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인격체로 성장해갈 수 있는 가능성은 분명하다.



마치며


 분명 현재 외부적 요소들은 교사들에게 낙관적이지 않다.

사회에서는 문제가 생기며 학교, 교사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 일쑤이다.

또한 교사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그런 수업을 한다는 보장 또한 없다


 하지만 그 안에서 교사가 힘을 낼 수 있고 자아를 지킬 수 있는 가장 큰 기둥은 바로 수업이다.


 교사는 학생뿐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라도

수업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수업은 필연적으로 교사의 자아를 담기 때문에

수업 포기는 자신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수업을 포기한 선생님들도 

언젠가 한 번은 학생들과 서로 교감하며

멋진 수업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나도 설명에 빠져들어가고,

학생들도 숨죽이며 나를 보는 그러한 

황홀함의 순간.


 수업 시간이 지난 후에도 계속되는 설명에

학생들이 지루해 하지 않고 계속 듣는 그 순간들.


수업을 마쳤을 때 학생들이 힘들고 지쳐서 지루함에 내뱉는 한숨과,

엄청난 예술 작품에 몰입한 후 내뱉는 듯한 한숨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경험해 본 교사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이다.


 나를 포함한 모든 선생님들이 수업에서

지식의 전달자가 아닌 스승으로서

존중받고 행복하기를 바란다.




비교해 볼 책

무지한 스승 - 보편적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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