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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니쌤 Nov 30. 2020

[북 리뷰] <싯다르타>-헤르만 헤세

동일성의 사랑



오늘 리뷰 할 책은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싯다르타'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인지만, 데미안에 견주어 뒤지지 않을 만큼 큰 울림을 주는 명작다.


 제목의 '싯다르타'는 우리가 알고 있는 부처의 본명 '고타마 싯다르타'에서 따온 이름이며,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이다. 헤르만 헤세는 싯다르타의 성장기, 구도기를 통해서 세계를 전체로 바라볼 수 있는 단일성을 깨닫고, 싯다르타가 자아를 완성해가는 과정을 매우 세밀하게 포착해낸다.


 길이도 길지 않고(175p), 문장이 크게 어렵지는 않다. 하지만 그리 만만한 책은 아니다. 전반적으로 실존주의 철학이 깔려있으며, 불교의 내용까지 들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미안보다는 쉽게 읽을 수 있다.

 (여담이지만 많은 분들이 '데미안'을 쉽게 생각하고 읽기 시작하지만 굉장히 어려운 책이다.)



싯다르타의 줄거리


 싯다르타는 인도의 가장 높은 계급인 브라만 계급의 자제로 태어났다. 그는 영특하고, 건강하게 자라며 모두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브라만의 생활에서 행복보다는 불만을 느꼈다. 아버지와 어머니, 친구들의 사랑과 신들에게 바치는 제사들이 싯다르타 자신을 충만하게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경전을 보아도 싯다르타의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으며, 주변을 돌아보아도 진정으로 경전에 나오는 깨달음을 현실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마침 사문의 무리가 싯다르타가 사는 곳을 지나간다고 하여, 싯다르타는 친구 고빈다와 함께 사문의 무리에 입적한다. 본래 제사와 경전 연구를 하던 싯다르타는 자아의 몰락을 통해 영원한 윤회와 불멸의 흐름을 느끼고자 단식, 고행, 명상 등의 수행을 한다. 그러나 그런 수행의 결과 결국 자기 자신으로 회귀하기를 수차례 반복하였다.


 이러한 수행의 결과 싯다르타는 사문의 무리에도 자신이 원하는 깨달음의 길을 간 사람이 없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배울' 수 없으며, 결국은 '앎'으로써 자신이 체득하고 수행하는 방법밖에 없음 또한 느끼게 된다. 사문의 무리에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없던  싯다르타는 친구 고빈다와 사문을 떠나 '고타마'라는 깨달음을 얻은 자의 소문을 듣고 그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찾아간다.


 고타마의 가르침은 막힘이 없었고 큰 울림을 주었다. 그에 감동한 고빈다는 고타마의 제자로 입적하였지만 싯다르타는 오히려 고타마의 가르침이 자신의 깨달음을 방해한다고 느꼈다. 싯다르타는 고타마와의 만남을 통해서 세상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신이 스스로 관찰하고, 생각하며 알아가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실하게 깨닫고 자신만의 길을 가기로 한다.


 자신만의 길을 떠난 싯다르타는 카말라라는 매춘부와 만나면서 육체적 쾌락과 감각을 배워갔고, 카말라의 소개로 카마스바비라는 상인을 만나 큰돈을 벌고 명예를 획득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싯다르타는 점점 젊은 시절 추구했던 고귀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깨달음을 망각하고, 마구잡이로 살아간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깊은 환멸에 빠지게 된다. 이를 깨달은 싯다르타는 명예와 부를 모두 미련 없이 버리고 정처 없이 길을 떠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강 앞에 있었다. 그 강은 젊은 날 싯다르타가 고타마를 만난 후 자신만의 길을 추구하며 처음으로 건넜던 곳이었다.  젊은 날 강을 건네어주던 사공 바수데바를 만난 싯다르타는 강이 흘러가는 것을 관찰하고, 강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를 통해 삶의 큰 흐름을 깨닫고 다시 한번 구도의 길을 걷게 다.


 바수데바와 지내던 중 젊은 날 쾌락을 즐겼던 카말라와 그의 아들을 만난다. 카말라는 뱀에 물려 독사하고, 싯다르타는 난생처음 본 자신의 아들에게 많은 정성을 쏟아 잘 기르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아들은 싯다르타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고, 결국 집을 나가버렸다. 싯다르타는 아들을 찾아 나서려고 하지만 바수데바의 만류로 찾지 않게 된다. 아들의 일로 큰 상처를 받은 싯다르타는 강가에서 강물의 이야기를 들으며 세상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으며 각자 나름의 목적지가 있음을 깨달았다.


 깨달음을 얻은 싯다르타가 바수데바와 웃으면서 작별하며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싯다르타의 깨달음 - 단일성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은 자라면, 싯다르타의 깨달음은 무엇일까?

이 책은 줄거리보다 싯다르타의 깨달음, 곧 헤르만 헤세가 생각하는 인생의 관점을 숙고해보아야만 그 가치가 있는 책이다. 의외로 싯다르타의 깨달음은 책의 곳곳에 직접적인 단어로 표현다.


바로 '단일성'이라는 단어


단일성이란 무엇일까? 헤세는 단일성에 대한 개념적인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 다만 싯다르타와 바수데바의 말과 행동 그리고 헤세의 해설로 추측해볼 뿐이다. 책을 읽은 후 내가 내린 '단일성'에 대한 나름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모든 사람과 생명이 이루고 있는 삶의 모습이
 각각의 가치를 이루고 서로 그 가치를 존중하며
하나의 전체적인 생명 공동체, 운명 공동체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가치판단의 문제

 사람은 살아가며 스스로의 길을 걷기 위해 가치판단을 해야한다. 그 과정에서 단일성을 망각하고, 서로의 가치를 존중하기 힘들어진다.

 단일성을 이루는 모든 순간들이 항상 도덕과 아름다움, 선(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모순, 악, 잔인함 등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과 바라지 않는 것 그리고 비도덕적인 것 또한 존재한다. 모든 존재의 공동체 안에서 삶이 각각의 가치를 가진다면 우리는 다른 존재의 삶의 모습에 대해 감히 가치 판단할 수 없다.

 니체가 말하듯 우리가 어떤 것의 가치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한발 뒤로 물러서서 그 삶의 외부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모든 존재가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생명 공동체에서 다른 사람의 삶에 한 발짝 물러서는 것이 가능할까? 동일성 안에서 다른 사람의 삶의 가치를 평가한다는 것은 내가 속해있는 현실과 생명, 삶에서 벗어나야만 가능한 것다. 이를 위해서는 현실을 도피해야 하고, '도덕'과 '관념'에 사로잡혀 자신만의 진리와 잣대를 타인과 다른 생명체에게 들이대는 것이 된다.


  깨달음을 얻기 전 싯다르타도 그의 자아에 갇혀 세상을 '평가'했다. 시장의 모든 것을 타락한 것이라고 폄하하였으며 명상과 수행으로 삶과 거리를 두었다.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싶어하면서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책과 제사, 고행으로 도피했다.


 이것을 알아차린 싯다르타의 말이 정말 멋있다.



단일성에 이르는 방법


 그렇다면 단일성을 깨닫고 느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첫째는 '자아'라는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자아'는 나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해주고 목표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동시에 자아는 단일성으로 연결된 삶의 흐름과 자신을 단절시킨다. 자아에만 갇혀있다면 우리는 근시안적이고 폐쇄적인 사고를 할 수밖에 없다. 싯다르타의 첫 번째 깨달음 또한 '자아'를 인식하고 이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에서 얻어졌다.


 둘째,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구하고 의지하려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자아를 벗어나는 것은 직립하는 것이다. 자기의 생각 없이 남에게 배우고 의존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스스로 세상을 바르게 바라볼 때에 비로소 단일성에 이르는 첫걸음을 뗄 수 있다.


 셋째, '단일성'에 이르고자 한다면, 책에 있는 글자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아야 한다.  삶의 단일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상 모든 만물이 바로 '단일성'이라는 책의 글자와 문장들임을 깨닫고 세상을 읽어야 한다. 싯다르타는 깨달음의 문턱에서 자신이 지금까지 해탈을 위해  '신에게 보내는 제사', '경전 읽기', '명상', '고행' 등을 배웠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그런 제도와 가르침에 파묻혀 '세상'이라는 책의 내용을 보지 못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단일성을 알게되었다.


 넷째, 시간의 개념이 단일성을 가로막고 있다. 싯다르타가 단일성의 가르침을 '느낀' 장소는 강이다. 강물의 소리를 듣고, 강물을 바라보면서 모든 존재와 사건이 강물 속에서 동시에 흘러감을 느낀다. 즉, 시간이 사라지고 '동시성'이 존재함을 깨닫는다.


 시간 개념에 사로잡히면 과거와 미래의 사이인 현재에 '인과'에 갇힌다. 과거에 사로잡히면 나의 현재를 온전히 긍정할 수 없다. 현실을 불평하고, 불만을 가지게 되며. 미래에 사로잡히면 나의 현재를 희생하게된다. 인과에 사로잡힌 삶은 지금 살고 있는 순간이 아무것도 아닌 상태가 된다.


 어쩌면 우리는 자아와 시간에 사로잡혀서 현재의 소중한 순간을 놓치고, 자만심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싯다르타, 깨달은 자의 궁극적 사랑


  싯다르타는 모든 존재를 관통하는 '단일성'을 깨달은 자다.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은 세상의 전체 생명이 어떻게 흘러가며, 자신의 충동이 모두 침묵할 때 느낄 수 있는 가장 초월적인 경지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 높은 경지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느끼는 자이다


 단일성과 해탈의 최고조는 모든 존재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싯다르타의 사랑은 모든 존재를 가능성으로서 사랑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각자의 삶의 가치를 가지고, 그것이 하나의 단일성을 통해 세상을 이루고 있다. 어떤 이는 돈을 통해 삶의 의미를 얻고 어떤 이는 봉사를 통해 삶의 의미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어 돈을 밝히는 사람보다 봉사를 하는 사람이 '선하다'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단일성에 이른 싯다르타는 돈과 봉사, 선과 악 모두 세상을 이루는 요소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든 이유들이 존중받고 하나의 가능성으로 남아있게 되고 이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싯다르타의 사랑이자 깨달음이다.


마치며


 선과 악에 따라 가치판단을 하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싯다르타의, 헤르만 헤세의 메시지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물론 헤르만 헤세가 살인, 강도 등 범죄까지도 옹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과 존재가 가진 맹목적인 삶에의 의지,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모든 것들을 참아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하여  헤세의 글을 통해 우리가 어느 정도 '도덕적인 잣대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바라볼 때, 세상의 모든 면을 긍정할 때 우리의 번민과 고뇌가 사라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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