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고래를 다 읽고 덮은 후,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이다. 약 500p 정도 되는 소설을 3일 만에 다 읽었다. 이렇게 빨리, 흥미롭게 읽은 책이 얼마 만인지! 더구나 한국소설을!
소설 '고래'의 줄거리
소설은 '춘희'라는 주인공의 등장부터 시작된다. 그러다가 중간에 아무 상관 없어 보이는 '노파', 그리고 춘희의 어머니 '금복'으로 거슬러가 그녀들의 이야기를 펼친다. 사실 소설을 읽다 보면 중간에는 춘희의 어머니인 금복이 주인공이다. 그러다가 춘희의 이야기로 소설이 마무리된다.
줄거리는 이 정도로 간략하게 적어도 될 듯하다. 이제 내가 이 책을 읽고 생각해 보고 생각했던 점들을 이야기해볼까 한다.
장면 전환의 입체성
영화나 드라마 등 영상 매체에서는 장면의 전환이 있을 때 이전의 장면과 겹쳐지는 분위기 또는 상징적인 것들이 나타난다. 그 점에서 소설 고래의 장면 전환에서는 매우 입체적이고 영상적인 느낌이 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총은 언젠가는 발사되어야 한다.
- 안톤 체홉
소설 속에 등장하는 총은 언젠가는 발사되어야 한다. - 안톤 체홉
이 말은 소설의 구성 요소들이 매우 치밀하게 구성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특히 소설은 인물 또는 인물들이 빚어내는 갖가지 갈등과 그에 대한 인물의 대응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인물 간의 관계가 매우 치밀하게 구성되어야 한다.
소설 고래에서 장면 전환의 입체성을 실현시키기 위해 작가는 여러 가지 장치를 활용한다. 그중에서 특히 이미 한 번 등장했던 인물들을 이용한다. 보는 사람에 따라 미리 예상했을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굉장히 재밌는 요소였다. 모든 장치와 인물이 일회성을 띄는 게 아니라 '이게 여기서 이렇게 활용된다고?' 하는 느낌이 들었다.
수평과 수직의 이미지
수평과 수직의 이미지는 이 소설의 전체와 주제를 관통한다. 수평은 시간의 영원함, 수직은 인물의 생애에서 나타나는 삶의 상승기와 하강기이다. 이 소설에서는 인물마다 상승과 하강의 반복을 보여준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특히 금복과 춘희의 이야기에서 잘 느낄 수 있다. 줄거리에서 소개했듯 소설 고래의 주인공은 금복과 그의 딸 춘희이다. 이 두 인물은 영원한 삶의 수평선을 말해준다. 금복은 죽음으로 그녀의 시간을 다 했지만, 춘희라는 딸이 그녀의 시간을 이어간다. 비록 춘희의 시간은 어린 딸의 죽음으로 멈춰버렸지만.
주목할 점은 '금복->춘희의 시간적 수평'안에서 각각의 삶의 수직적 상승과 하강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를 보며 '반복되는 수직적 상승과 하강의 인생이 수평선의 시간 위에서 영원히 인간에게 반복되는 것' 떠올렸다.
영원한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의 수직적 상승과 하강... 마치 삼각함수의 sin 그래프가 떠올랐다. 물론 모든 사람의 주기와 최대, 최솟값은 다르고 그래프 x 축의 끝도 다르겠지만 말이다.
삼각함수 sin x의 그래프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평대'라는 마을도 수직과 수평의 이미지를 동시에 상징한다.'평대'라는 이름에서 우리는 넓은 땅, 수평적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그러나 평대는 사실 산간 지방이었지다. 수직의 공간인 산을 허물고 세운 마을이다. 즉, 평대라는 공간적 배경도 지리적으로 산이 허물어지는 하강을 경험했지만 동시에 기찻길이 들어서면서 그 장소에서 가장 번화했던 상승의 시간을 맞이했다. 삶은 이렇게 두 세계가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평대의 수직적 이미지도 수평적 이미지 위에 놓여있다. 상승과 하강은 언제나 그렇듯 수평의 시간 위에서 반복된다. 이곳에서 춘희의 이야기는 끝나지만 평대의 시간은 흘러간다. 춘희라는 인간의 상승과 하강, 생명력이 무너졌지만 수평의 이미지인 평대의 시간은 영원하다. 삶이란 얼마나 무상한 것인가.
소설의 표현을 빌려서
이것이 시간의, 영원의 법칙이다.
문명이란 무엇인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것처럼 우리는 소설을 생각했을 때 '삶이란 얼마나 무상한 것인가' 하는 허무주의와 마주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문명과 현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문명이란 무엇일까? 어차피 압도될 수밖에 없는 삶의 수평적 축인 시간의 법칙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허무함을 가려주는 가면이 바로 문명이다. 우리는 애써 가려둔 본질적인 모순과 예측 불허한 삶을 문명으로 덮어두고, 세상을 최대한 안전하고 예측 가능한 것으로 보려고 노력한다. 죽음과 허무함이라는 본질은 흔히 종교, 문화, 우상 숭배 등의 이름을 가진 (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 장막으로 덮여있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 고래에서는 이 문명의 베일, 장막을 벗겨버린다. 그러고는 그 아래에 숨겨져 있던 모든 충동, 욕망, 모순 등을 최대한 깊게 그리고 적나라하게 보여주려고 한다. 이러한 의도와 영상 같은 장면 전환이 만나서 그 모든 충동이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진다.
삶의 본질, 고통과 허무함을 무엇으로 극복할 것인가.
우리가 기댈 수 있고, 안정성을 추구하는 문명이라는 베일을 다 걷어낸 상태에서, 우리는 삶의 심연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에게 다가올 죽음이라는 확정적인 미래와 그로 인한 허무함이 그것이다.
소설 후반부에 묘사되는 주인공 '춘희'의 모습은 문명의 장막을 걷어낸 생명력 그 자체를 드러낸다. 그녀는 옷도 없고, 먹을 것도 없으며 하루하루 투쟁을 통해 살아간다. 그녀에게서 현대인의 모습은 도저히 떠올릴 수 없다. 하지만, 그녀가 문명에서 멀어질수록 우리는 그녀에게서 생명력과 의지를 발견한다. 수평의 시간위에서 죽음과 소멸하는 운명에 압도당하면서, 아니 압도 당하는지도 모른 채 발산하는 생명력이야말로 우리 삶을 지탱하는 본질 아닐까?
생명력의 상징
그런 의미에서 제목이기도 한 '고래'는 생명력을 상징하는 거대하고 신비로운 존재이다. 등장인물 금복도 고래를 본 순간 압도되었다.
금복은 믿을 수 없는 거대한 생명체의 출현에 압도되어 그저 입을 딱 벌린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물고기가 사라진 뒤에도 금복은 한동안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그녀는 방금 전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고래> - 62p
이후 금복은 돈을 많이 벌었을 때도 고래 모양의 극장 건물을 지을 정도로 고래가 주는 안도감, 생명력의 압도감을 느꼈다. 그녀는 평생 동안 고래를 다시 보고 싶어 했지만 볼 수 없었다.
생명력을 향한 금복의 갈망은 나중에 금복이 남성의 복장을 하고 다니는 것으로 귀결된다. 남성적인 것과 생명력은 언제나 연결되기 마련이다. 고대 그리스의 생명력의 신 디오니소스를 기념하는 축제에서도 거대한 남근의 모양을 한 조형물을 들고 다니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고래와 금복의 남성화를 통해 우리는 생명력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얼핏 들여다볼 수 있다.
허무에 맞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원천은 생명력이다. 문명에 가까워질수록 인간은 안전하게 살 수는 있지만 생명력은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딸 춘희가 보여주는 야생적인 생명력이 그것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