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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이 Aug 24. 2022

실패한 삶

2020년 12월 22일의 기록

나는 사람의 심리라고 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았다. 감정으로 얽힌 모든 관계가 시시해질 것 같아서, 나의 의지와 선택이 결국은 ‘심리’라고 하는 정해진 알고리즘을 따르는 것일 뿐이라는 답을 얻게 될까 봐 두려워서였다. 그런 심리를 학문으로 공부했다는 상담사를 신뢰할 수 없어서 나는 상담이라는 행위에도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상담을 내가 어떻게 받게 되었고 또 효과를 보게 되었는가를 떠올려보면, 시작은 ‘학습전략검사’였다.


29살,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언젠가, 학습전략검사라는 것을 무료로 해준다는 학내 교수학습센터의 현수막을 보았다. 학부생뿐만 아니라 대학원생도 대상에 포함되어있어 – 대학에 돌아와 보니 대학에서 제공하는 여러 서비스는 학부생만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아 내심 서운하던 차였다 - 반가운 마음에 검사를 받으러 갔다. 약 일주일 만에 결과가 나왔다는 연락을 받고 검사 결과를 확인하러 갔다. 고등학교 때 의미 없이 해오던 여러 검사들처럼, 검사 결과지와 해설지만 받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내가 안내받은 곳은 상담실이었고, 나는 한 시간여 동안 검사 결과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학습전략검사는 말 그대로 학습을 하는 데 있어 어떤 전략들을 현재 활용하고 있고, 또 어떤 전략이 스스로에게 더 효율적인지를 분석하는 검사이다. 그때는 다시 시작한 공부가 한참 재밌었던 시절이라 학습 동기 유발이나 전략적 측면에서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아주 양호한 편이었다. 다만 한 가지, 정상 범주로부터 눈에 띄게 그래프가 뚝 떨어져 있는 항목이 있었다. 바로 ‘학업적 자아효능감’이었다. 말하자면 당시 나의 상태는 공부도 재밌어하고 잘하고 있는데 이것이 궁극적으로 나에게 좋은, 혹은 유익한 결과를 가져 오리라는 믿음은 전혀 없는 상태였다.


결과를 해설해주던 연구원은 이 항목 수치가 너무 낮다며, 학습 실패의 경험이 있느냐고 물었다. 학습 실패의 경험이라. 떠오르는 게 너무 많아 나는 헛웃음이 났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내 인생은 학습 실패 투성이었다. 학습 실패뿐이랴, 삶 자체가 그냥 실패한 삶이었다.


어쩌다가 수능을 잘 봐서 목표했던 대학, 원했던 전공을 택할 수 있었지만 학점은 늘 평균 수준을 조금 밑도는 정도였고, 학부 수준의 전공과목도 채 소화하지 못했으니 시험에 합격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것도 그냥 시험도 아니고 ‘고시’를. 하지만 ‘고시생’이라는 타이틀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는 꽤 오랫동안 시험을 포기하지 못했고, 그만큼의 실패를 맛봤다. 고시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새로운 선발 제도인 전문대학원 시스템이 도입되었을 때, 그건 전공 시험이 없다고 하니 해 볼만 하지 않을까 하고 덤볐다가 또 실패의 경험만 무겁게 쌓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20대 시절은 성공의 경험이 전혀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도, 그 무엇도 해낼 수 없으리라는 믿음이 단단하게 굳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내 또래 정도 되어 보이던 그 연구원은 깊이 공감한다는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듣더니, 아주 조심스럽게 심리 상담 이야기를 꺼냈다. 단순히 학업적 자아효능감의 문제가 아니라 자존감이 무너진 상태일지도 모른다며 학내의 심리지원센터를 방문해 볼 것을 권했다.


다들 그런 거 아닌가, 요즘 세상 다들 취업 어렵고, 그러니까 다들 우울하고, 다들 나 같은 거 아닌가. 마냥 그렇게 생각했던 나의 상태가 수치상으로는 ‘심각하다’고 하니, 그런가, 심각한가, 뭔가 해야 하나,라고 처음 생각하게 됐다.


학습전략검사의 결과를 곰곰이 곱씹어보며 나는 심리 상담을 받는 것에 대해 고민했다. 알아보니 학교의 심리지원센터는 학교 구성원 모두에게 심리 상담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었다. 밖에 나가서 받으면 한 번에 막 10만 원씩 받고 그런다는데, 할 수 있을 때 한 번 해보자 싶어 나는 상담을 신청했고, 그렇게 나의 첫 상담이 시작되었다.


호밀밭출판사 We-rite 참여 원고

http://bu-rite.com/bbs/board.php?bo_table=we2&wr_id=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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