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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르바 Nov 29. 2020

그녀의 발걸음에 나는 뛰었다.

마음의 속도

서울에서 볼 일을 마치고 오송역에 내렸다. 기차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퇴근 시간이라서 그런가. 너 나할 것 없이 다들 무표정했고, 걸음들은 축 처져 보였다. 승객들은 떼를 지어 에스컬레이터를 타거나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 역시 느릿느릿 버스 정류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때 백팩을 멘 한 젊은 여성이 잰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내 가속 페달을 밟은 듯 속도를 높이더니 나를 제치고 뛰다시피 했다.


앞서가는 그녀를 보자 나도 모르는 사이 걸음걸이가 빨라졌다. 육상부 출신인 장점을 십분 활용해 걷는 듯 뛰는 속도로 바로 앞 몇 명을 제쳤다. 그녀의 걸음은 마치 나비효과 같았다. 나를 포함해 정류장으로 향하는 무리들의 걸음걸이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녀의 빨라진 발걸음에 뒤따르던 사람들의 걸음이 질세라 빨라지고, 그걸 본 내가 뛰고, 나를 본 또 다른 사람들까지 따라붙는 꼴이었다. 무언가에 홀린 좀비들이 쫓고 쫓기는 레이스를 펼치는 것처럼 보였다.


짧은 레이스를 마치고 정류장 앞에서 줄을 섰다. 생각해 보면 숨이 찰 정도로 허겁지겁 정류장으로 달려온 데 특별 이유는 없었다. 막차를 놓치는 상황이었다거나 급한 약속이 있었던 건 아니었으니까. 버스는 5분 간격으로 정류장에 도착하니 서서 갈 일도 없었다. 그녀의 의도치 않은 출발 신호에 맞춰 다 함께 속도를 높여 뛰어갔으니, 내가 다른 사람보다  앞서서 버스를 꼭 먼저 타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걸음걸이가 빨라지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급한 일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평소처럼 같이 걸어갑시다"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는가.


내가 뛴 이유는 오직 하나로밖에 설명되지 않았다. 그녀가 먼저 뛰기 시작했다는 것. 나를 앞서가 달려가는 그녀를 본 순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본능적으로 뛰었다는 이 어울릴까. 나도 모르게 옆사람의 걸음을 따라잡으려 뛰다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고작 삼분이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진 발걸음의 변화였으니까. 하지만 무의식적인 몸의 반응은 사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차근차근 오랜 시간 학습돼 온 움직임의 산물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오늘의 발걸음처럼 옆사람의 속도를 이겨내느라 목적 없이 경쟁적으로 걸어온 수많은 날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그날들은 나의 걸음을 가져가지 못하던 때로 기억된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앞으로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어서 기뻤다기보다는 남들이 다들 가고 싶어 하는 대학에 들어갔다는 사실에 기뻐했던 것 같다. 내가 정말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 진득이 빠져들기보다는 남들이 다 공부한다는 자격증과 토익시험에 매진했다. 취직을 할 때가 되니 내가 하고 싶은 일과 무관한 분야의 기업이지만 남들이 선망하는 대기업에는 눈길이 갔다.


흔들리지 않고 나의 걸음을 걸어가는 은 불안했지만, 남들이 뛰는 속도를 따라가는 일은 외려 편안다. 옆사람의 속도에 따라가는 것은 조금 버거울지라도 실패 확률을 낮추 고민할 에너지를 아끼는 안전한 방법럼 느껴졌. 하지만 남의 발걸음에 맞춰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 정녕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이었나. 나만의 페이스를 잃어버린 걸음은 결국에는 휘청거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무한 경쟁사회의 레이스에서는 모두 옆사람이 뛰는 속도에 뒤처지지 않으려 목적지를 향해 뛰어가니, 결국 모두는 도착했지만 지행복할 수 없는 모순에 빠지는 게 아니었을까.


버스가 도착할 때쯤 가쁜 숨을 진정시키고 주위를 둘러봤다. 가장 먼저 스타트를 끊은 그녀를 찾았다. 이미 떠나버린 걸까. 그녀는 신기루처럼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껏 다른 이들의 발걸음에 이끌려 오늘의 나로 지금 여기에 도착해 있지만, 그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텅 빈 마음만 남아 있을 뿐이다.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서야 내가 걸어온 길의 이유를 찬찬히 되짚어본다. 마음의 속도를 높여버린 순간 내가 놓쳐버렸거나, 나로 인하여 밀려나 버린 것들은 무엇이며, 또 그것들은 얼마나 많을 지금으로서는 도무 가늠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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