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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용 Nov 09. 2019

어느 지중해 섬에서


그럴 때가 있지 않나요. 바로 오늘 일어난 일인데도, 꿈처럼 아득히 멀게 느껴질 때 말입니다. 내게는 이곳의 하루하루가 그렇습니다. 조금이나마 내가 느낀 감정을 당신에게 전해주고 싶어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여기는 어느 지중해 섬입니다. 햇빛은 유난히 따뜻하고 풀들은 천천히 흔들리는 곳입니다.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투박한 돌산을 볼 수 있습니다. 코끼리 엄니 색 건물들은 언제 보아도 새로웠습니다. 나는 매일 아침 이 풍경을 마주할 때마다, 내가 어디서부터 어떤 여정을 거쳐서 이 도시에 남게 되었는지를 되짚어봐야만 했습니다.


오후에는 낯선 골목을 산책했습니다. 돌로 된 길을 성벽을 따라 걸었습니다. 낡은 간판을 읽고 맥주를 마셨습니다. 나는 돌담에 몸을 기대어, 바다와 선착장과 오래된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이 섬에서 나는 다시금 바다를 좋아하는 이유를 떠올립니다. 바다는 가까이서 보면 수많은 높낮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멀리서 보면 그것들은 한데 모여 꼭 한편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살아가는 일과 닮아있어서 오랫동안 바라보기를 좋아했습니다.


한 번은 보트를 타고 먼바다로 나갔습니다. 저편에 지층이 새겨진 절벽이 거대했습니다. 나는 내 안경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풍경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한눈에 담을 수 없을 뿐이었습니다. 그런 자연의 거대함은 내 인생을 바꿀 정도는 아니지만, 어린 시절 지녔었던 감각을 되살리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상하게도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Ballad Pour Adeline)'가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아주 어릴 적에, 어머니가 내게 쳐주었던(그랬다고 생각되는) 피아노 연주곡이었습니다. 언젠가 어머니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 이야기를 꼭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섬은 은퇴한 노부부와 닮았습니다. 나는 머무르는 동안 '왜 우리는 열심히 살아야 할까.'라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들었습니다. 사실은 이 도시처럼 그냥 흘러가도 괜찮지 않겠냐는 마음이었습니다. 나는 어떠한 이룸이나 나아짐을 바라지 않고도 기뻐할 수 있는 삶을 상상해보았습니다. 그러자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내 인생은 불행한 것이다.'라는 믿음이 지금껏 나를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만큼 나는 이 섬이 주는 여유로움에 쉽게 길들여졌습니다. 가끔씩 울리는 종소리에도 초연해질 무렵이었습니다.


이런 우화가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개의 꼬리를 잘라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 주인은 개를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하루에 1인치씩 잘랐습니다. 그는 꼬리를 조금씩 잘라서 어떻게든 사랑하는 개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었습니다. 결국 그는 사랑하는 개에게 더 많은 고통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나는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나는 이 도시를 점점 사랑했고, 시간은 꼬리를 조금씩 잘라냈습니다.


나는 '행복'이란 단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너무 무분별하게 쓰여서 닳고 닳은 단어라는 생각입니다. 지금껏 대체할만한 단어가 없어서 썼을 뿐입니다. 이제 나는 이 섬의 이름으로 대신하면 어떨까 합니다. 테라스에서 노을이 지는 바다를 바라보며 맥주를 마실 때, 또는 하루가 영원처럼 느껴질 때, 또는 어떠한 외로움이나 괴로움이 감히 나를 덮치지 못할 때, 나는 이 섬의 시간을 꺼내어 중얼거릴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꼬리를 1인치씩 잘라가는 이 시간을 소중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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