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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용 Mar 31. 2019

비가 오면 바다로 가자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조각들

1

그때는 몰랐지만 돌이켜보면 와 닿는 말들이 있다. 내게는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그렇다.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당시 할아버지는 대외적으로 존경받던 사람이었다. 여러 봉사 단체에서 회장도 하시고, 상패도 종종 받아오셨더랬다. 하지만 내게는 그저 '할아버지'였을 뿐이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물었다.

"성용아."
"네, 할아버지."
"비가 오는 날에 바다에서 수영해 본 적 있니?"
"아니요. 비가 오는 날에 왜 수영을 해요. 비에 다 젖겠어요."
"기분이 정말 좋단다. 이왕에 비에 젖었으니까 기분 좋게 수영할 수 있는 거란다."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할아버지가 비 오는 날 바다 수영을 하시는 장면을 머릿속에 그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는 깊게 남았던 모양이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의 나는 그 말을 이렇게 받아들인다. ‘비가 내리는 건 바다에 있으면 아무 일도 아니다. 네게 쏟아질 힘듦, 괴로움, 시련들도 커다란 인생에서 바라보면 오히려 즐거움이 된단다.’라고. 할아버지는 그런 분이셨다.



2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매주 주말이면, 나와 동생을 데리고 근처 저수지로 산책을 다녀오셨다. 산책을 할 때는 늘 빵과 우유를 사들고 갔더랬다. 주로 정통 크림빵이나 보름달 빵이었다. 저수지를 보며 간식을 먹고 돌아오는 게 우리의 코스였다. 어느 날은 슈퍼에 갔는데 빵이 다 떨어져 있었다. 할아버지는 우유만 사들고 나왔다. 그리고 다른 슈퍼 앞에 도착하자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너희는 여기 앞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왜요, 할아버지? 같이 들어가면 안 돼요?"
"우리가 그걸 들고 가면 가게 주인이 얼마나 속상하겠니. 할아버지가 금방 사 갖고 오마."


나는 그런 할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차피 우리 돈으로 산 건데 무슨 문제가 될까. 되려 귀찮은 일을 하시고 있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전하고 싶었던 건 이런 게 아니었을까. '이치에 맞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란다.'라고. 내가 전해 들은 할아버지의 삶은 늘 사람을 향해 있었다. 남들은 미련하고 바보 같다고 말해도, 언제나 그런 점에서는 고집을 피우셨단다. 당신의 삶을 내려놓으면서까지 말이다. 지금의 나는 그런 할아버지를 존경한다.



3

할아버지는 갑작스럽게 떠나셨다. 사고였다. 어린 마음에 죄책감이 들었다. 내가 학교에서 조금만 일찍 왔더라면 살아계시지 않았을까 하고. 내가 할아버지와 함께 나갔으면 아무 일도 없지 않았을까 하고. 내게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일 시간이 없었다. 모종의 의식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병원에 누워계셨을 때도, 장례식장에도 결국 가지 못했다. 어른들은 나와 내 동생이 ‘죽음’을 마주하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15년이 지난 지금도, 내게는 할아버지가 어딘가 여행을 떠나신 느낌이다. 마치 비가 오는 날이면 어느 외국의 바닷가에서 수영을 하고 계실 것만 같았다. 뭍에 있는 나를 돌아보며 ‘기분 참 좋다. 이리로 들어와 봐라.’라고 말하실 것만 같았다. 내게 할아버지는 그런 모습으로 남아있다.



4

할머니는 어느새 아흔을 훌쩍 넘기셨다. 오늘은 요양원을 찾아 할아버지에 대해 여쭸다.

"할머니."
"응."
"혹시 할아버지 기억나세요?"
"기억 안 나."
"이름도 기억 안 나세요? 윤 종자 구자 쓰셨는데."
"기억 안 나."
"얼굴도 기억 안 나세요? 예전에 할머니랑 할아버지랑, 우리랑 같이 살았었잖아요."
"나는 너희들밖에 기억 안 나."
"아이고, 할머니. 그래도 할아버지랑 몇십 년을 같이 사셨는데…"
"늙어서 그렇지... 사람이 변하는 거지, 그렇게."



할머니 말이 맞다. 할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할머니도, 15년 전 당신의 말을 이해하는 나도 변했다. 사람이란 게 그렇단다. 슬프게도 그렇게 변해가는 거란다. 그렇게 흘러가는 거란다. 나는 할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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