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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용 Aug 05. 2019

비를 맞고도 웃을 수 있기를


일기예보는 맑음이었습니다. 우산을 두고 집을 나섰습니다. 10분쯤 걸었을까요. 마른하늘에 천둥소리가 들립니다. 공사장 같은 소리였습니다. 소나기가 쏟아졌습니다. 꽤 굵은 빗줄기입니다. 나는 어느 고깃집 천막 아래로 몸을 숨겼습니다. 갈대밭처럼 비가 내리는 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보았습니다. 공사장 인부들은 헐벌떡 뛰어나오고 있었습니다. 물안개가 이는 와중에도 햇빛은 아스팔트를 비추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변덕스러움을 배웠나 봅니다.


비를 맞는 게 무척이나 싫은 나이가 되었습니다. 어릴 땐 비를 좋아했습니다. 나는 우산을 쓰고도 언제나 옷을 적셨습니다. 물웅덩이에서 철벅철벅 발을 구르곤 했습니다. 이토록 많은 물이 하늘에서 내린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울 수 있었습니다. 걱정이 없던 시절입니다.


나는 문득 이상한 오기가 생겼습니다. 설명하기 힘든 기분이었습니다. 굳이 표현해보자면 '나는 그때와 다르지 않아.'와 비슷한 무언가입니다. 비가 무서워서 천막 아래 몸을 숨기는 자신이 한심해질 때쯤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빗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정류장까지 6분 정도 거리였습니다. 나는 달리면서 매몰차게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받았습니다. 미지근한 온도와 무게가 머리와 옷에 닿았습니다. 나는 이상하게도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내 안에 있는 단단한 구조가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정류장에 도착했습니다. 가쁜 숨을 몰아 쉬었습니다. 비에 젖어 엉겨 붙은 머리칼, 앞이 보이지 않는 안경, 끈적한 피부와 축축한 직물이 느껴졌습니다. 기분이 좋았습니다. '해냈다'라는 기분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잔잔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나는 정류장에서 젖은 몸을 천천히 말렸습니다. 5분쯤 지났을까요. 비가 사그라들기 시작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비가 그쳤습니다. 나는 깨끗한 공중을 허망하게 바라보았습니다.


미련 곰탱이.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래도 비를 맞는 기분이 오랜만에 나쁘지 않았어.' 참 속없는 사람이지요. 어떤 일이라도 웃으면서 넘기고. 결국엔 소소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것이 저다운 모습입니다. 그게 반가웠습니다. 비를 맞지 않았다면 나는 떠올리지 못했을 겁니다.


살면서 예상치 못한 폭우를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최선을 선택하지는 못합니다. 만약 최선도 최악도 없는 선택이라면 어떨까요. 어느 쪽이어도 괜찮은 삶 말입니다. 물론 나 자신을 탓하고 싶고, 세상을 욕하고, 다른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고통을 잊기 위해 노력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오랜 시간에 걸쳐 알았습니다.


당신도 비를 맞고서 웃을 수 있다면 나는 좋겠습니다.

설령 그렇지 못하더라도 당신 잘못은 아닙니다.



by. Johannes Ro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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