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면 익숙한 도시도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다. 매일 걷는 산책로도, 지하철 창가 사이로 보이는 양화대교도, 길을 지나는 사람들도, 시월의 햇살 아래에서는 모두가 낯설고 생경했다. 구름을 처음 보는 아이처럼 이 세계를, 시대를 자꾸만 바라보았다. 오늘의 햇살을 만나기 위해 나는 지난 일 년을 그토록 살아왔나 보다.
오후에는 여행 중에 연인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찾아 읽었다. 내가 보낸 모든 편지에는 '그립다'는 말이 적혀있었다. 그 말이 반가웠다. 나는 그렇게 우리가 서로 그리워했던 시간이 있었음을 다시금 발견했다. 기다림이 나의 일상이 되었을 때, 나는 우리가 함께하고 있음을 비로소 알았다. '빈자리'라는 단어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을 쯤이었다.
기다림은 한 시간을 열 시간으로 만든다. 기다림은 사람을 행복하고도 무력하게 만들며, 시간이라는 보이지 않는 흐름을 드러낸다. 기다림을 모두 모으면 그 거리는 얼마나 될 것인가. 그 거리만큼 다시 걷게 된다면 과연 어떤 마음을 갖게 될까. 나는 그런 엉뚱한 상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모든 기다림은 부디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절도 내게 있었다.
떠나기도 전에 그리워지는 가을이 왔다. 무화과는 부드럽게 익어가고 바람은 쓸쓸하게 스치며, 무엇보다도 습기없이 바스락거리는 햇볕에 세상은 새로운 면을 내게 보여준다. 마냥 천진하지도, 너무 절망하지도 않은 계절. 이런 계절이라면 다음 일 년도 기꺼운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