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시절, 나는 소설에 푹 빠져있었다. 책을 사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산 책들은 무엇보다도 소중한 물건이었다. 책장을 시원하게 펴지도 못했다. 밑줄은커녕 모서리를 접는 행위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책을 산다는 것은 나에게 큰 기쁨이었다.
그 감각은 여전히 남아 있다. '입을 옷이 없어.' 옷장 앞에서 투덜대는 그녀처럼, 나는 읽을 책이 없다며 서점으로 향하곤 했다. 책을 가득 사온 날에는 배가 고프지 않았다. 빳빳한 종이 냄새, 한 번도 손이 닿지 않은 페이지, 각자 개성을 가진 책들을 보고 있노라면 펼쳐보지 않아도 마음이 울렁였다.
읽는 속도보다 쌓이는 속도가 빠를 때, 책은 밀린 숙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언젠가 김영하 소설가가 말했다. '책은요.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라 산 책 중에서 읽는 거예요.' 그 한마디에 오래 묵은 체증이 사라졌다. 이후로 나는 죄책감 없이 책을 살 수 있었다.
책장에 놓인 책을 보기만 해도 지적 자극이 되었다. 이를테면, 일 년째 읽지 않은 <자유와 존엄을 넘어서>는 제목만으로도 내게 지적인 존엄을 줬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두꺼운 존재감으로 무인도에 떨어져도 마음이 놓일 것 같은 안식을 줬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표지에서 달리는 하루키를 볼 때마다 꾸준히 고군분투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좋은 삶이란 내 안에 기쁨을 조금씩 쌓아가는 과정이라고 믿는다. 그러니 나는 책 사는 즐거움을 오래도록 누리고 싶다. 친구처럼 평생 지니고 살았으면 하는 책들이 있다. 그것이 나의 물리적인 공간을 차지할 수 있도록 언제나 자리를 내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