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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용 Jan 08. 2019

존재라는 상자

손 끝에 가까스로 걸쳐서 금방이라도 떨어뜨릴 것 같은

1.

나를 가두고 있는 이 존재는 무엇인가.


나를 짓누르는 살의 무게, 막혀있어서 숨 쉴 수 없는 코, 뻑뻑한 목마름, 어제 먹은 음식물과 끈적한 침과 위액이 섞인 토사물을 담고 있는 위장, 뻣뻣하게 조여 오는 뒷 목, 이마와 눈 근처를 제멋대로 찌르는 머리카락. 뇌는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지만, 그렇다면 이 실체 없는 고통은 어디서 오고 있단 말인가. 아, 의욕을 잃은 껍데기여. 바람이 빠진 풍선이여. 건전지 없는 장난감이여. 휘발유 없는 자동차여. 불과 사랑을 모르는 인간이여. 취하지 않고 추는 춤이여. 띄어쓰기 없이 연속된 문자들이여.



2.

그러나 살아있음은, 존재하고 있음, 그 존재의 무게를 견디고 있음과 같은 말인 듯 하이.


존재의 무게는 너무나 무거워서, 손 끝에 가까스로 걸쳐서 금방이라도 떨어뜨릴 것 같은 상자인데. 상자에 무엇이 들었는지 몰 차마 떨어뜨리지도 못하고, 일단 힘이 닿을 때까지만 걸음을 한 발자국씩 내딛여보는 중인 상태가 우리인데. 가끔은 그냥 놓아버려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오를 정도로 손가락이 마비되고, 땀이 흐르고, 머리가 멍해지는 때가 지금이다.


내 상자 들고 버티는 자세도 겨우 감당하고 있으되, 남들이 나를 어떻게 쳐다보든 손가락질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를 흘겨볼 수 있는 시각의 여유와 상자를 한 손으로 들고 있거나, 또는 들고 있지 않거나, 또는 다른 사람이 대신 들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누가 잘못하고 있고, 누가 정의롭다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애초에 가치의 판단이 가능하냐만은. 그것은 그저 사실인 거지, 차가운.



3.

그때 옆에서 누가 묻는 거지.

혹시 둘이서 같이 들어보면 어떨까.


내 상자 하나, 너의 상자 하나를 겹쳐서 말이야. 오른편은 내가, 왼편은 네가 잡고서 말이야. 한 걸음씩 박자에 맞춰서 말이야. 비록 우리  상자가 커다라서 서로의 얼굴도 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지금보다는 낫지 않겠냐는 거지? 나는 말한다. 그래, 그래도 둘이라면 혼란한 상태는 오지 않겠지. 우울하지 않겠지. 정해진 박자가 있으니까. 발맞추어 걸어야 하니까. 기계처럼. 그래, 맞아. 기계처럼.


걷다 보면 같이 들어줄 아이도 생길 거야. 물론 클 때까지 시간은 조금 더 걸릴 거고. 상자의 무게는 더 무거워지겠지만은, 우리는 행복할 거야. 그래. 발맞추어 걷는 발자국이 두리, 넛이, 여서이 찍히겠지. 아니, 여서이는 너무 많고, 두리.


더 이상 상자를 들 필요도, 앞으로 걸어 나갈 필요도 없을 때가 오겠지. 아, 나는 그날이 너무나 기다려져. 왜냐면 힘들잖아. 우리 힘들었잖아. 그때가 되면 상자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당신 얼굴을 볼 수 있잖아. 두 손을 맞잡을 수도 있잖아. 양팔을 벌리고 시원하게 누울 수도 있잖아. 아, 나는 그날이 진정으로, 진정으로 기다려져.



4.

그럼 묻는 거지. 애초에,

지금 당장 상자를 내려놓으면 되지 않느냐고.


상자에 가려진 당신 얼굴을 보면 되지 않느냐고. 두 손을 맞잡으면 안 되느냐고. 양팔을 벌리고 시원하게 누우면 안 되느냐고.


그럼 당신은 말하는거지. 무슨 소리야. 우리는 젊어. 우리는 건강해. 우리는 버틸 수 있어. 상자를 들고 있다는 건 행운이야. 정말 행운이지. 암. 특히 요즘 같은 세상엔 말이야. 우리가 들고 있는 건 무거운 것도 아니야. 다른 사람들은 더 반짝이고, 세련된 상자를 들고 있다고. 정말 대단하지, 안 그래. 그러니 우리는 내려놓을 수 없어. 나는 지난 30년간 상자를 들고 한 방향으로 걸어왔어. 그것도 꽤 멀리 말이야. 다들 지나온 길이지. 앞서간 사람들 말이야. 우린 뒤쳐진 사람들이지.


하지만 우리는 이제 막 걷기 시작했는걸?

나도 알아. 그리고 뒤쳐졌지.

그렇게 되는 건가.

그렇게 되는 거야.



5.

실은 말이야. 계속 궁금했었어.

사실은 상자 속이 더 중요한 거 아닐까.


무엇 때문에 이리도 무거운지 말이야. 무엇이기에 들고 가야 하는지 말이야. 그 의미를 말이야.


그럼 당신은 말하는거지. 오, 달링. 당신은 생각이 너무 많아. 우리는 세상을 자각했을 때부터 상자를 들고 있었어. 그렇게 태어났다고. 이것은 우리의 숙명인 거야. 안에 무엇이 들었든지, 들지 않았든지, 그게 쓸모 있는 것인지, 쓸모없는 것인지, 그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인지 알아도 말이야. 만약 그걸 알게 돤다고 해도 말이야. 들고 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 오, 그럼. 변하지 않지. 어쨌든 계속된다고. 오히려 모르는  속 편하지. , 달링. 당신은 로맨티스트구나. 이상주의자구나. 현실과 떨어져 있구나. 다른 직업을 가진 철학자구나. 우리는 건전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떻게 전기를 발생시키는 지 전혀 모르지만 작동할 수 있지. 우리는 시계가 어떻게 알아서 돌아가는지는 모르지만 시간을 볼 수 있지. 우리는 도자기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구워지는지 모르지만 그릇에 음식을 담먹을 수 있지. 이, 바보 멍텅구리 같은 달링. 귀엽고도 가여운 생각을 다 했네. 오, 진지하게 말한 건 아니겠지. 기특하지만 그런 생각이라면 우리는 같이 걸을 수 없을 거야. 오, 만약에 진실로, 진실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면 말이야.


아, 나는 로맨티스트구나. 이상주의자구나. 현실과 떨어져 있구나. 다른 직업을 가진 철학자구나. 바보에 멍텅구리구나.

그래, 그런 거야.

그렇게 되는 건가.

그렇게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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