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옛날 아주 먼 옛날에 안경을 쓰고 싶은 아이가 있었습니다. 아이는 티브이를 얼굴 바로 앞에 두고 보았더랬죠. 차가운 브라운관에는 코가 닿았고요. 빨간색, 초록색, 파란색 육각형을 보고 있었어요. 자세히 보면 아무 의미가 없었는데요. 그것이 퍽 재미있던 모양입니다. 아이는 안경을 쓰게 되었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그리고 아이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끝.
나는 안경이 없으면 쓸모가 없습니다. 눈 앞이 흐려지고요. 바로 앞도 볼 수 없어요. 자연스럽게 걸을 수도 없어요. 보고 싶은 것은 볼 수가 없고요.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사물의 경계가 점점 사라지고요. 그토록 선명했던 언어는 그라데이션으로 존재합니다. 차가운 벽과 나는 결국 하나가 되겠지요.
차라리 눈을 감는 게 나을 거예요. 오히려 선명해지겠지요. 어쩌면 전에 보지 못한 것들을 볼 수도요. 일테면 눌려있던 콧등의 자국이라든지, 요양원에 앉아있는 할머니라든지, 한때 잊혀진 꿈이라든지. 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아니, 나는 꽃처럼 살고 싶어요. 얼굴을 꽃에 파묻고요. 그대로 잠들고 싶어요. 따뜻한 꿈을 꿀지도 몰라요. 이제 보니 나는 풀이었네요. 아무도 내가 있는 걸 알지 못해요. 그저 어렴풋이 사라질 뿐이에요.
나의 쓸모가 이십오 그램짜리 안경에 달렸다는 건 나를 허망하게 하는데요. 누군가에 대한 나의 사랑이 이십오 그램짜리 안경에 달렸다는 건 나를 더욱 허망하게 합니다. 그때는 누가 나를 바라봤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뻐하고요. 누군가 내게 실망했다는 사실에 실망하기도 했는데요.
나는 부끄럽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그리도 선명하게 보고 있다는데. 내게는 그들이 보이지 않다는 게요. 혹시라도 내가 보인다면 어떤지 말해주세요. 나는 거울을 보아도 알 수가 없어요. 희멀건 구체들. 어쩌면 그게 내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어미 손을 놓친 벌거숭이예요. 추운 줄도 모르고 황망히 서있어요. 그러니 내게 속삭이지 말아요. 나는 내가 보는 세상 속에 살고 있어요.
나는 무섭습니다. 세상이 그대로라는 게. 내가 보는 사물은 이리도 불안하게 흔들리는데요. 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게요. 그러니 나는 술을 마실래요. 흔들림이 흔들리면요. 오히려 선명해진대요. 그러나 나는 안경의 안경이에요. 배우고 싶은 게 많았어요. 가르쳐주고 싶은 것도 많았고요. 하지만 그 무엇도 쓸모가 없었고요. 오히려 혼란스럽게 만들었고요. 중요했던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네요. 나는 안경의 안경입니다.
나는 안경이 없으면 쓸모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