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자였다. 엉성했다. 그래도 꼭 다시 책을 내고 싶다.
생애 첫 책이었다. 그리고 적자였다. 그나마도 제작비의 절반 정도를 크라우드 펀딩으로 감당할 수 있었다. 도와준 지인과 후원자 분들에게 다시금 감사드린다. 책 자체에도 아쉬움이 남는다. 글 내용은 차치하고서라도 단순한 오타가 눈에 밟혔다. 교정, 교열할 때는 왜 미처 발견하지 못했는지. 나의 엉성함을 여러 번 반성했다.
조금 부끄러웠다. 책을 잘 읽었다고 담담히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작가가 되었다며 치켜세우는 사람도 있었다. 또는 책이 그냥저냥 별로였다고 평하거나, 감성적이고 부끄러운 내용을 강조하며 놀리는 친구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글을 쓴 사람으로서 부끄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실은 대부분 어느 쪽이냐 하면 '무관심'이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책 읽기에 관심이 없었다. 아니, 내 책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전문 작가도, 대단한 인물도 아닌 평범한 인간의 여행 에세이는, 아마 나라도 그리 신경 쓸 것이 못 될 물건이라 생각된다.
그럼에도 꼭 다시 책을 내고 싶다. 특히 책을 낸 뒤에 이 생각이 커졌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참고로 독립출판에 대한 Q&A 글도 썼다.(https://brunch.co.kr/@zorbayoun/19)
책을 내고 가장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건 독자들(대부분 지인이지만)의 반응이었다. 만약 100명에게 책을 보냈다고 가정하면, 그중에 50명은 내게 책을 잘 읽었다고 전했다. 그중 15명은 책에 대한 감상과 의견을 말해줬고, 그중 3명은 내 책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결국 내가 실질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독자의 감동은 전체의 3% 정도뿐인 셈인데, 그것으로도 내게는 꽤나 벅차고 강렬한 경험이었다. 그것은 '3%의 사람만을 위해서라도 몇 권의 책을 더 낼 수 있겠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다가왔다.
뿐만 아니라 책에 대한 수많은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다. 좋았던 점도, 아쉬웠던 점도 있었다. 대략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좋았던 점
- 읽기 쉽게 쓰였다.
- 삽입된 여행사진이 좋았다.
- 감정을 담담하게 잘 풀어냈다.
- 함께 여행하는 느낌의 묘사가 좋았다.
아쉬웠던 점
- 구어체나 과한 감정표현 부분이 민망했다.
- 책 전반을 관장하는 큰 주제가 없어서 아쉬웠다.
- 후반으로 갈수록 힘이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모든 의견에 감사드린다. 누군가의 글을 읽고 의견을 주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의견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믿는다.
게다가 글이 실제로 독자에게 어떻게 전해지는가를 실감(實感)할 수 있었다. 물론 개개인마다 차이가 있을지라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비슷한 경향을 보였다. 이로써 내 글쓰기의 장점과 고쳐야 할 점을 분명하게 알게 된 것이다. 아는 것만으로도 큰 성장의 발판이 된다. 만약 책을 내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기록되고 분석되고 요약되고 정리된 정보를 설명하고 논의하는, 그림이 첨부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한 딱딱한 표지를 씌운, 커버는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는, 머리말, 소개, 목차, 인덱스가 있고 인간 지식을 높이고 풍성하게 하며 계몽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시각 기관을 통해, 어떤 사람에게는 촉각 기관을 통해 전달되는 물건이요." (교수 : 그게 뭔가?) "책이요."
영화 <세 얼간이> 주인공 '란초'의 대사
영화에서 주인공 '란초'는 개념을 딱딱하고 이론적으로만 설명하는 교수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일침을 놓는다. 책이란 정말 단순히 '기록된 종이뭉치'뿐일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책 읽기'보다 '책 사기'를 더 좋아한다. 읽을 책은 사는 게 아니라, 산 책 중에서 읽는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그것은 '종이책'만이 가진 특별한 매력이 있어서다. 종이책은 활자뿐만 아니라, 종이의 질감, 색깔, 두께, 무게, 향기 등을 오감으로 즐기는 매체다. -쓰고 나니 너무 과장한 감이 있지만, 그래도 사실이다.- 게다가 글자의 폰트, 모양, 크기, 간격 등등 다양한 요소에서 편집자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이는 내가 전자책을 절대로 읽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가출판을 했다. 즉, 책이 나오는 모든 과정을 내 손으로 직접 했다는 뜻이다. 표지와 내지를 편집하고 디자인했다. 종이의 종류와 무게를 고르고, 제본 방식과 규격을 정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을 받았을 때 감동이 밀려왔다. 내가 노력한 결과가 물리적인 감촉으로 느껴진다는 건 굉장한 일이었다. 특히나 앨범 대신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듣고, 무형의 가치를 만드는 데 집중하는 현대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비록 그 과정이 수월하진 않았으나 나만의 무언가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여하여 만들어낸다는 건, 누구나 꼭 한 번쯤은 경험해볼 만한 일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는 아무런 맥락도, 근거도 없이 '나도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라는 생각이었다고. 그것으로 작가의 길을 걷는 여정이 시작됐다. 하루키는 아무리 독자가 늘어나고 유명 작가가 되어도, '내가 즐기기 위해서 쓴다'는 기본적인 자세는 달라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의 명성에 비해, 참으로 솔직하고 순수한 이유다.
1978년 4월의 어느 쾌청한 오후에 나는 진구 구장에 야구를 보러 갔습니다. (…) 1회 말, 다카하시가 제1구를 던지자 힐턴은 그것을 좌중간에 깔끔하게 띄워 올려 2루타를 만들었습니다. 방망이가 공에 맞는 상쾌한 소리가 진구 구장에 울려 퍼졌습니다. 띄엄띄엄 박수 소리가 주위에서 일었습니다. 나는 그때 아무런 맥락도 없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문득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 나도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라고.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말이 길어졌으나, 결론적으로 책을 내고 싶은 이유는 '내가 좋으니까'다. 퇴사가 트렌드가 된 이 세상은 더 이상 '경제적 안정성'과 '실리(實利)'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제는 자신이 무엇을 할 때 행복하고 만족하는가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게다가 무엇을 시도하든 간에 필요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세상이다. 결국 남은 건 '내가 즐거운가?'라는 질문뿐이다.
꼭 책이 아니어도 좋으니, 막연하게 두었던 로망을 시도해보는 건 어떨까. 굳이 거창한 이유를 만들지 않아도, 스스로를 설득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내가 좋으니까', '내가 즐기기 위해' 해보는 거다. 비록 실속이 없고 철이 없어 보여도 좋으니, 일단 어깨 힘을 빼고 가볍게 툭툭 휘둘러 보자. 나는 앞으로 그런 일들이 더 많아지길 바란다. 나에게도, 나의 주변 사람들에게도. 하루키가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 그 날처럼, 누군가 2루타를 날릴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