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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용 Jul 31. 2021

여름과 자전거


여름이 왔다. 계절의 경계가 무엇이고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여름이 왔음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여름이 오면 잠들어 있던 자전거를 꺼낸다. 올해 봄부터 복도에 놓인 자전거가 눈에 밟혔다. 그러나 나는 천성이 게으른 사람이어서 '꼭 해야만 하는 순간'이 올 때까지 먼저 움직이는 일이 없다. 그러다 따가운 햇살과 후덥지근한 공기를 마주한 순간, '아, 이제는 자전거를 꺼내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라는 마음이 충동적으로 었다.


잠들어 있던 자전거에는 회색빛 먼지가 쌓여있었다. 나는 조금 미안한 감정과 함께 자전거를 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햇살을 비추어준다.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볕일 것이다. 동굴 같은 곳에서 반년을 보내서 그런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바퀴에 바람이 없어서 오래 굶은 사람처럼 푹 퍼져 있었다. 우선은 그를 씻기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먼저 등목을 하듯 엎드려있는 자전거에 물을 끼얹는다. 그리고 물티슈를 두어 장씩 꺼내어 묵은 먼지를 쓱쓱 닦는다. 브레이크 선도 부드럽게 감싸 내려가고, 손잡이와 역삼각형 모양의 프레임도 원래 색깔을 되찾을 때까지 정성스럽게 문지른다. 구석구석, 손이 잘 안 닿는 부분도 신경 써야 한다. 이런 디테일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어쨌든 오늘이 아니면 다음 여름 때까지 남아있게 된다. 새까만 물티슈들이 수북이 쌓였을 때 자전거는 옛 모습을 되찾았다. 여전히 늘씬하고 세련된 자전거였다.


단장을 마쳤으니 이제는 바퀴에 바람을 넣어줄 차례다. 집 근처의 자전거점까지 깔끔해진 자전거를 끌고 간다. "어떻게 왔어요?"라는 주인아저씨의 말에 "자전거에 바람 좀 넣으려고요."라고 대답한다. "그래, 아뎁타는 있고?"라는 물음에 "예, 여기 가져왔어요."하고 조그만 어댑터를 주머니에서 꺼내 보인다. 자전거마다 공기주입구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공기주입기를 사용하려면 밸브를 변환해주는 어댑터가 필요하다. 주인아저씨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돌려 다른 손님을 맞이했다. 나는 무릎을 굽혀 바퀴를 붙잡고 바람을 넣어준다. 홀쭉했던 바퀴가 금방 차올라 단단해졌다. 손가락으로 바퀴를 치니 '통통'하고 맑은 소리가 났다. 나는 배고픈 후배에게 밥을 사 먹인 것처럼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원래 자전거만 정비하고 집으로 갈 생각이었으나, 말끔해진 자전거를 보니 마음이 바뀌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한강을 따라 곧장 여의도 공원까지 달렸다. 사람들은 돗자리를 펴고 즐거운 듯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땀은 기분 좋은 만큼만 났다. 바람을 맞으면 팔다리가 민트처럼 시원할 정도까지만 습기가 올랐다. 그날따라 이상스럽게 기분이 좋았다. 아마도 미루어 둔 일을 해냈다는 점과 여름 바람을 온몸으로 실컷 맞았다는 사실과 내 손으로 무언가를 더 나은 상태로 만들었다는 성취감 때문일 것이다. 내 주변에 있는 것들이 더 나은 상태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나는 자전거를 제자리에 두고 집으로 돌아가 작은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정비하면서 얻은 기쁨은 관성처럼 나를 또 다른 성취로 이끌었다. 밀린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광이 나도록 인덕션을 닦고, 폐건전지를 모아 버리고, 필요한 생활용품을 구매하고, 책을 정리하고, 아내의 푸념을 가만히 들어주었다. 밤이 되어 침대에 누웠을 때는 '오늘 하루 정말 잘 보냈다.'라고 소리 내어 말했다. 여름이 오면서 내 안에 무언가로 다시 충만해졌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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