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집, 그러니까 처가에는 '또또'라는 반려견이 살고 있다. 15년을 살아온 스피츠 종의 노견(老犬)으로서, 윤기를 잃은 흰색 털과 느릿느릿한 걸음걸이가 할아버지를 연상케 한다. 그는 내가 올 때마다 저 멀리서 천천히, 한 발자국씩 다가온다. 그리고 슬쩍 냄새를 맡고선 등을 내밀어 보인다. 만져달라는 뜻이다. 그러면 나는 등줄기를 따라 두 손으로 정성스럽게 안마를 한다. 5분쯤 지났을까. 마사지로 지친 손을 거두면, 또또는 나를 슬쩍 올려다보고는 다시 어디론가로 천천히 사라진다. 매번 반복해도 지루하지 않은 인사법이다.
내 팔다리에는 오랜 피부병으로 상처와 흉터가 있다. 또또는 가끔 내게 다가와 다리에 있는 상처를 핥아준다. 그것은 마치, 예전에 할아버지가 다리에 난 생채기에 빨간약을 발라주었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동물적인 본성에서 나온 행동이겠지만, 나는 이 노견에게 보살핌 받는 존재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기뻤다. 혹시나 개의 침에는 인간의 상처에 대한 어떤 영험한 효능이 있지 않을까 생각되어 인터넷에 검색해봤더니, 개의 침은 인간의 상처에 아무런 효과도 없으며 오히려 700여 가지의 박테리아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또또의 보살핌을 피하기 시작했다. 그럴 때면 '나는 널 이렇게나 생각해주고 있는데, 왜 너는 나를 피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은 그의 의문스러운 눈빛과 마주해야 했다.
개는 어떤 의미에서 외국인과 닮아 있다.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행동양식을 갖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원하는 욕구는 같다. 그래서 서로 말이 통하지 않더라도, 이를테면 화장실이 급하다거나 배가 고프다거나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어쩌면 함께 살아가는 데 있어 그 이상의 소통은 사치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개와 인간 사이에 고도화된 의사소통이 가능해진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평화롭게 살아가지 못할 것이다. 반려견과 말싸움을 하고 그 말로부터 상처를 받거나 주는 일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개와 지내다 보면 살아가는 일이 참 단순하게 생각된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것, 좋아하는 사람에게 귀여움을 받는 것, 하루에 두 번 이상 산책하는 것, 사료보다 더 맛있는 간식을 먹는 것, 편안하고 안전한 공간에서 잠을 자는 것. 이것들만 지켜진다면 그들은 더 바라는 것이 없다. 지나치게 바라는 마음은 필연적으로 불행을 가져온다. 인간은 바라는 것이 많아 불행한 날도 많다는 것을 개와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또또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조금 더 오래 함께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