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버린 것

박물관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by 조세핀


어렸을 때 현장학습으로 가서 발을 디디거나, 애들과 주말을 어찌 보내지 싶은 부모님들의 고민 끝에 다다르거나 하지 않고서야 국립중앙박물관에 갈 이유는 딱히 없었다. 왤까? 나의 경우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국사책' 그 자체였기 때문인 것 같다. 국사책에서나 볼 법한 이미지 자료들을 실물로 볼 수 있는 곳 정도였던 그 박물관은 이번 방문으로 내 마음속에 새로운 그림으로 자리 잡았다.



평일 낮에 방문한 박물관은 유치원생과 초등학생들로 가득했다. 아마 현장학습으로 왔으리라 짐작하고, 그 나이 때 나는 얼마나 이 박물관을 돌아보는 것이 힘들었는지 떠올렸다. 넓고 광활한 이 삼층짜리 건물은 전시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 혹시 내가 놓치는 것이 있을까 염려하며 돌아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1층부터 3층까지 모두 봐야 했고,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돌아다녔기 때문에 답답한 느낌까지 들었다면 이번에 이곳에 온 나는 다 큰 어른이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봐도 된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2층부터 갔다. 2층에서 나를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사유의 방'이었다.

사유의 방은 삼국시대 6세기 후반과 7세기 전반에 제작된 우리나라의 국보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두 점을 나란히 전시한 공간이다. 어둡고 고요한 복도를 지나면 왼쪽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얹고 오른쪽 손가락을 살짝 뺨에 댄 채 깊은 생각에 잠긴 반가사유상을 만나볼 수 있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설명에 나와 있듯 사유의 방 안내를 따라 들어서면 어두운 길이 놓여있다. 눈이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정도로 어두운 그 길을 지나면 동굴 속에 들어온 것 같다. 그리고 동굴 안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두 점의 반가사유상이 놓여있다. 내부도 그렇게 밝지 않아서 표정을 자세히 볼 수는 없지만 왜인지 영험한, 오롯한, 엄중한 느낌이 공간을 아우르고 있다. 나도 그곳에서 좋은 생각을 떠올려보고 싶었지만, 어린 친구들이 '이게 뭐지?' 하는 느낌으로 몰려들어와서 뒷걸음질 쳐 밖으로 나왔다. 셋이서만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싶으면 이른 아침에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생각하는 사람'을 소재로 한 조각들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정적이기 때문에 소재로써 적합하기도 하겠지만, '생각'이라는 것은 사실 빠르게 지나가버리고 사라지는 것이니 그 순간을 표현하고자 하는 예술가들이 많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기가 많았던 사유의 방을 지나 2층에 있는 기증관으로 향했다. 많은 사람들이 기증한 전시품들이 놓여있었다. 예전에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누군가의 컬렉션과 셀렉션을 본다고 생각하니 사람의 취향이란 것은 정말 넓고도 깊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누군가는 장롱만 모으고, 누군가는 도장만 모으고, 누군가는 다다미 돌만 모았다. 그리고 그 모은 것들을 또 모아서 전시해두었다. 오랜 기간 소중하게 나름의 박물관을 만들어 온 사람들은 또 누굴까 싶어서 기증자의 소개글도 열심히 읽었다. 많은 보물들 중에 도자기 작품들이 눈에 들어왔는데, 어떻게 저렇게 빚었지? 싶을 만큼 세밀하게 신경 써서 만든 것들이 많았다. 용이 올라가는 모습을 손잡이에 표현해 두기도 하고, 투박함과는 거리가 아주 먼 예술 작품들이었다.



나전칠기 장식장들도 아름다웠다. '끊음질'이라는 기법을 써서 만들었다는 자개장은 도대체 만드는데 얼마나 걸렸을지 가늠이 안될 정도로 세밀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그 무늬 또한 현대적이어서, 이런 패턴의 가구가 있다면 꼭 사야지하고 마음먹었다.



기증품들을 모두 둘러보고 건너 편의 서화관으로 향했다. 아래 사진으로도 찍었지만,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서화는 다양한 부채를 그려놓았는데, 그 꼴라주한 솜씨가 세련되고 현대적이었다. 만들면서도, 그리면서도 재밌었지 않았을까 상상도 해보고, 예술이라는 것은 역시 시대를 막론하고 계속 좋아 보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가의 방이라는 콘셉트로 꾸며놓은 곳도 있었는데 누군가의 평범한 방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구도나 배치가 제품 촬영장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신경 써서 만들어서 재밌었다.




작은 것들을 좋아하는터라, 사진은 작은 것들 위주로 찍었지만, 어마어마한 크기의 예산 수덕사 괘불도 불교 회화실에 있으니 꼭 보면 좋겠다. 장엄하고 장대해서 괘불의 왼쪽 구석부터 오른쪽 모서리까지 보려면 그곳에 놓여있는 안내책자를 참고해서 봐야 했지만, 그림이 주는 위압감을 느껴본 것이 오랜만이라 색달랐다.



전시실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3층의 조각, 공예관이다. 3층까지 올라올 힘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지 3층에 사람이 별로 없었던 것도 한몫했지만 이런 것도 도자기로 만들었다고? 싶을 만큼 특별한 것들이 많았다. 그 시대 사람들이 예술혼을 불태운 분야는 아마도 도자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꽃이 새겨진 잔, 특이한 모양의 접시 등 쉬이 여길 수 없는 작품들, 그러나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를 작품들이 마음을 일렁이게 했다.



나도 잊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보물들이 이렇게 많은 작품들이 이곳에 있으며, 자신을 봐주고 감상해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방탄소년단이 공연을 하거나, 만찬이 열릴 때만 이 박물관에 대해서 생각했을 뿐이었다. 어렸을 때도 분명 이들을 봤을 텐데, 다시금 보니 그때와는 또 다른 감상이 들었다. 이미지로 레퍼런스를 찾던 사람들이 이곳에서는 실제로 작품을 이리저리 살펴볼 수 있어서 영감을 받기에도 매우 좋은 곳 같다. 한국의 문화가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는 지금, 어쩌면 너무 어린 시절이라, 너무 과거라 잊었던 것들에서 멋진 것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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