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Ceci n’est pas une pipe.”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이미지의 배반, Renee Magritte> 우리가 보는 것은 파이프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본질은 파이프와 닮은 이미지에 불과하다. Markus Raetz는 이미지의 배반을 더 높은 차원의 수수께끼로 끌어올린다.(non-pipe, 1992) 그의 작품을 돌아서 걷다 보면 덩어리에 불과했던 형상이 우리에게 익숙한 무엇인가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 순간은 찰나에 불과하고 우리에게 익숙했던 그 이미지가 아닌 형용할 수 없는 덩어리로 되돌아간다. 관람객은 그 덩어리가 본질적으로 파이프가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그 속에서 파이프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그 형상을 발견했을 때 일종의 즐거움을 느끼고 파이프의 형상을 각인한다.
Raetz의 다양한 작품 스타일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보는 이가 있어야만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가 다양한 언어를 통해 계속해서 말하고자 한 바는 인지하는 것 그 자체이다. 그의 작품에 대한 고찰은 관람객의 연상작용을 거쳐 형상화된다. 사람의 뇌는 새로운 대상을 접하면 그 즉시 자동으로 익숙한 대상을 떠올리도록 동작한다. 이러한 연상작용은 인류의 생존에 필수적이었으나 이러한 작용으로 인해 사람은 행동착오를 겪게 되기도 한다. 누구나 아는 사람인 줄 알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가 다른 사람이어서 무안했던 경우가 있을 것이다.
Raetz는 뇌의 연상작용이 가져오는 사소한 착오의 틈을 헤집고 관객에게 신기루를 선사한다. 그의 작품은 관객에게 경계의 부재, 즉 끊임없이 뒤바뀌는 형상의 흐름으로 인지되며, 그러한 왜곡과 변형 속에서 시각적인 놀라움의 다의성을 직관하도록 이끌어간다. 다시 말해, Raetz의 작품은 경계가 없는 덩어리에 현실의 이미지를 투사하여 찰나의 경계를 만들고, 인지를 통해 다시 경계가 없는 덩어리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그 찰나의 경계는 마치 김춘수의 <꽃>처럼 우리의 인식과 착상으로써 특징지어진 것이다.
관람객은 현실세계를 그림 속으로 집어넣는다. 이로써 현실은 유희의 대상이 되며 작품은 인지와 시각이라는 이름으로 쪼개진 파편들의 종합체가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림 맞히기 식 유희가 아니라 인지의 작용을 고찰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Raetz의 작품은 의미를 부여받으며, 관람객에게로 가 꽃이,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