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 하나를 오래 좋아한 적이 있나요? 나는 무엇 하나도 진득하니 좋아하질 못한다. 눈을 반짝이며 시작한 일도 금방 흥미를 잃어버린다. 동료 J를 보며 무엇을 오래 좋아하고 싶다면 나처럼 무식하게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비결 같은 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출근을 해서 사무실 문을 열면 기분 좋은 커피 향이 퍼졌다. 매일 아침, J는 하얀 종이 필터로 직접 핸드 드립 커피를 내려 마셨다. J는 전쟁처럼 돌아가는 회사에서도, 항상 오른손엔 커피를 들고 무사처럼 사무실을 활보했다. 어느 날, J가 돌연 커피에게 이별을 선언하자 동료들은 난리가 났다. "저 커피 좀 줄이려고요." 동료들은 J가 얼마나 커피를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J는 단지 커피를 좋아해서 커피를 참기로 했다며 동료들을 진정시켰다. 나는 그 말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좋아하면 더 자주 마셔야지, 왜 덜 마신다는 것인가? J는 커피를 습관적으로 마시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커피를 마시면서 느끼던 사랑스러운 기분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J는 충분히 기다린 다음에 커피를 마시기로 결심했단다. 평소에도 생각의 전환으로 동료들을 감탄하게 만드는 J였다. 역시나, 커피를 좋아하는 마음을 지키기 위해 커피를 기다린다는 생각도 내게는 좋은 자극이 되었다. 내 마음속 한 칸에도 좋아하는 것을 기다리는 마음을 숨겨둬 볼까,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J는 커피를 기다리는 시간이 이제는 일상을 설레게 만든다고 말했다. 나아가 오랜 기다림 끝에 마시는 커피는 맛있다 못해 짜릿한 느낌까지 든다고 하니, 나도 덩달아 매일 마시는 복숭아 아이스티를 참아볼까 싶어졌다.
내가 알고 있는 기다림은 마음을 간질이는 일이다. 뭐해? 좋아하는 사람에게 문자를 보내고 답장을 기다리는 시간은 모든 일을 제쳐두고 휴대폰만 보게 만든다. 도대체 무슨 답장이 올지 상상이 되지 않아 더 기대가 된다. 그 답장을 기다리는 시간은 모든 세상이 분홍빛 설렘으로 물든다. 위이이이잉. 답장이 도착하는 알림이 울리면 그제야 나는 내 심장의 존재를 알아차린다. 주체할 수 없는 심장을 부여잡고, 실눈으로 답장을 확인하는 그 감각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된다. 약속 장소에 미리 도착해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도 마찬가지다. 자리를 잡고 앉아 입구를 보고 있으면, 사람들이 드나들며 문이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한다. 문이 열리면 바람을 타고 설렘의 조각들이 들어오고, 문이 닫히면 조각은 향기가 되어 사방으로 넓게 퍼진다. 그러다, 그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지구가 반대로 돌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신이 혼미해진다. 기다림이 사랑에만 국한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인류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일지도 모르겠다. 매달 25일 월급이 들어오길 기다리는 시간, 6시를 5분 남겨두고 퇴근을 기다리는 시간, 후라이드 치킨을 주문하고 배달을 기다리는 시간, 휴가를 신청하고 떠나는 날을 기다리는 시간, 우리 모두의 일상은 크고 작은 기다림으로 가득 차 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할 수 있다면 그건 바로 나다. 나는 수술을 하고 나서 본능적으로 기다리는 일을 피하기 시작했다. 당장 오늘을 살아내기도 힘든데 무엇인가 느긋하게 기다리는 일은 사치였다. 휴대폰을 개통하면 권유하는 부과 서비스처럼, 나에게 기다림은 필수 옵션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엄마표 집밥도 더 이상 기다리지 않게 되었다. 엄마가 만든 돼지고기 김치찌개는 밥을 3 공기나 말아먹을 수 있었던 최애 메뉴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엄마가 무슨 음식을 하든 그 음식 냄새가 짜증이 났다. 코 끝을 자극하는 음식 냄새가 지겨워서 구역질이 났다. 친구들의 연락도 더는 기다리지 않게 되었다. 친구들은 안부를 묻는 연락을 종종 했지만, 답장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친구들이 나를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는 내게 상관이 없었다. 친구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내게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나를 괴롭히는 통증을 없애는 것이었다. 수술을 하고도 일 년을 넘게 호전되지 않는 통증은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삶의 의욕을 잃어갔다. 오늘도 역시 어제만큼 아팠으니, 내일도 분명 오늘만큼 아플 것이 분명했다. 내일에 대한 기대가 없어지니, 일상 속 기다림도 모두 사라졌다. 나는 그렇게 무엇 하나도 기다릴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수영을 시작하고 통증이 많이 줄었다. 일상을 덮치고 있던 통증이 줄어드니, 그 빈자리를 기다림이 채우기 시작했다. 새로운 수영법을 연습할 생각에 내일 아침이 기다려지고, 이번주 에피소드는 무슨 내용을 쓰게 될지 기다려지고, 독서모임에서는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기다려진다. 내 일상이 다시 설레기 시작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기다리는 감각을 다시 살려준 것은 역시나 음악이다. 그날은 음악 토크쇼 '비빔팝'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존박이 게스트로 나와 신곡을 미리 들려줬다. ALL I WANT 라는 신곡은 복잡한 세상을 단순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라는 이야기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존박은 특색 있는 목소리로 모든 음악에 재지(jazzy)한 숨결을 불어넣는 아티스트다. 그런데, 이 음악은 존박의 보컬보다 음악의 구성이 훨씬 좋았다. 도입부는 신디사이저 솔로로 간결하게 시작하고, 브릿지가 되어서야 리드미컬한 드럼이 추가된다. 덕분에, 진한 에스프레소 위에 올라간 스티밍 우유처럼 존박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내 마음을 적셨다. 사비에서 베이스 라인의 악기들이 잔잔하게 더해지면서 완성되는 하모니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풀어헤칠 정도로 편안한 톤을 자아냈다. 그러다가, 리듬이 스윙으로 전환되면서 박자가 여러 개로 쪼개지고, 전자 악기 사운드가 폭발하는데 온몸에 있는 털이 바짝 섰다. 음악을 듣는 내내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뒤덮인 환상 속 사랑에 빠진 것만 같은 감각은 음악이 끝나고도 이어졌다. 그래서, 음악이 끝나자마자 바로 다시 듣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Take it slow and let's keep it simple
천천히 그리고 단순하게 가자
You can have it all in time
시간이 지나면 너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어
Never knew less could be something more
적은 것이 더 많을 수 있다는 걸 몰랐어
In a world full of choices, you're the only one I'll make
선택이 가득한 세상에서, 내가 선택할 유일한 사람이 너야
존박 _ ALL I WANT 중
존박은 이 음악이 정규 앨범 수록곡이라고 말했다. 와, 대박! 나는 두 손으로 주먹을 꽉 쥐고 환호성을 질렀다. 요즘 정규 앨범을 내는 아티스트는 정말 귀하다. 제작, 홍보, 판매 등 비용을 고려하면 싱글 앨범을 내는 편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싱글 앨범을 달이라고 한다면, 정규 앨범은 별자리라고 할 수 있다. 신규 앨범은 달처럼 하나의 음악으로 밤하늘 밝히지만, 정규 앨범은 여러 음악이 서로 연결되어 밤하늘에 이야기를 만든다. 존박은 자신이 숨겨둔 이야기들을 음악으로 자유롭게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존박의 선배인 김동률이 존박의 정수를 담은 앨범이라고 칭찬까지 했다니, 나는 꼼짝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에게 문자를 보내고 답장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한 달 동안 존박의 정규 앨범이 나오기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오랜만에 다시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일은 조금 낯설었다. 글을 완성해야 하는데 자꾸만 앨범 생각이 나서 집중이 안 됐다. 당장 내일이 연재 마감인데 손가락을 접으며 앨범이 나오는 날짜를 세고 있었다. 동시에,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일은 삶의 활력이 되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몸이 조금 찌뿌둥하더라도, 한 달 뒤에 정규 앨범이 나올 생각을 하면 괜히 힘이 났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는 길목마다 빨간색 신호가 걸리더라도, 일주일 뒤에 정규 앨범이 나올 생각을 하면 괜히 신이 났다. 내 일상으로 어렵게 다시 돌아와 준 기다림은 부정적인 감정을 긍정으로 바꿔줬다. 10월 30일, 존박의 정규 앨범이 출시됐다. 음악 플랫폼을 키니 존박의 정규 앨범이 보였다. 무려, 11곡이나 들어있었다. 재생버튼을 누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히죽히죽 웃음이 났다. 나는 오늘 이 앨범 때문에 종일 행복할 것이 분명했다.
대나무는 하루에 최대 1미터까지 자란다고 한다. 단연 대나무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자라나는 식물인 것이다. 그러나, 대나무는 자라나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리는 식물이기도 하다. 처음 대나무 씨앗을 심고 나면 2~3년 동안은 뿌리를 내리는 일만 한다. 단 1센티미터도 성장하지 않는 것이다. 영양분을 흡수할 수 있도록 뿌리의 면적을 최대한 넓히고, 강한 바람에도 버틸 수 있도록 뿌리의 힘을 먼저 기른다. 성장에 필요한 모든 준비가 완료되면, 대나무는 폭발적인 성장을 시작한다. 대나무의 성장 속도는 사람의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르다. 식물이 자라나는 속도를 사람이 인지할 수 있다니, 대나무가 아니라면 그 어떤 식물도 해낼 수 없는 일이다. 대나무는 그렇게 몇 년을 자라나지 않고 기다리기만 하지만, 덕분에 몇십 년을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드러내며 멋지게 살아간다. 대나무를 보면서 기다리는 일이 가만히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되새긴다. 어쩌면, 기다림은 생존을 위한 필수 옵션인 것일까?
우리는 태어나고 기다리고 죽나니
살아서 가장 햇살 같은 날은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촛불처럼 기다리는 날이라네
양광모_기다림 중
양광모 시인은 사람은 평생을 기다리는 존재라고 말했다. 사람은 누구든 기다리는 일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상을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은 기다리는 일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순간,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지 아니면 답답한 마음으로 기다릴지 선택한다. 결국, 그 자그마한 선택이 우리를 행복하게 혹은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이제야 지금하고 있는 재활 생활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지금 당장 좋아하는 달리기를 하지 못해도 괜찮다. 달리기 대신 수영을 하면서 기다리면 되니까. 지금 당장 좋아하는 IT 기획 일을 하지 못해도 괜찮다. 일 대신 독서모임을 하면서 기다리면 되니까. 나는 기다리는 시간이 끝나면 모든 것이 회복될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아니, 오히려 나는 수술하기 전보다 더 건강한 사람으로 자라날 것이다. 2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는 이 기다림이 끝나면, 나는 분명히 폭발적으로 행복해질 것이다. 어쩌면, 내 행복의 성장 속도는 너무 빨라서 사람의 육안으로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으로 친구에게 답장을 부칠 수 있는 용기를 키운다. 띵동, 메시지가 전송되었습니다.
"12월엔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