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tte is horse
어느덧 공포증이 발생한지도 약 3개월이 지났다. 약을 꾸준히 먹고 있음에도 공포증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당시 유학생 (군 휴학 중)이었던 나는 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비행기는 물론이고 배도 탈 수 없었던 상황이기에 학교로 돌아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만약 어찌어찌 학교로 돌아갔다고 하더라도 당시엔 정신 상태가 많이 불안정한 상태였기에 학업을 다 끝마치지는 못 했을 것이다. 약 4년이 지난 지금 아주 가끔 오는 옅은 공포증만 남게 된 것을 보면 차라리 한국에 남게 된 것이 다행이라 생각한다. 대학교를 중퇴한 이후 마냥 쉴 수는 없었기에 빠르게 일자리를 알아봤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모른 채로 그저 ‘경영 기획? 이거 좀 재미있어 보이네.’ 정도의 생각으로 나의 첫 번째 직장을 선택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첫 회사로 상당한 꽝을 뽑았다. Latte is horse라는 문장이 없었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딱 저 문장 하나로 설명이 가능한 회사였다. 야근 강요는 둘째 치고, 참 쪼잔한 일들로 곤란을 겪었던 일들이 많았다. 당시 회사의 식비가 7,000원이었는데 막내가 회사 카드를 들고 다니며 계산을 했다. 문제가 있다면 대리급들이 예산을 초과해서 먹었다는 점이다. 예산을 초과한 사람이 돈을 더 내야 된다는 당연한 상식을 가지고 대리에게 갔을 때 그 대리님은 당시 신입 사원이던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저렇게 잘 좀 해봐요. 알죠?’ 알긴 뭘 안단 말인가.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가 도대체 뭔데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더는 얘기를 나누지 않겠다는 것을 몸으로 표현하는 듯 내게서 눈을 돌려버린 대리에게는 그 어떠한 것도 받지 못하고 쓸쓸히 내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자리에 돌아온 난 큰 고민에 빠졌다. 내 피 같은 돈을 내거나 예산 초과됐다며 욕을 먹거나 둘 중 하나였던 것이다. 약간의 고민 끝에 그냥 쿨하게 욕먹는 길을 선택했다. 당시의 난 어찌나 용감했던지.. 내가 속해 있던 팀의 부장한테 가서 예산이 초과했다고 돈 좀 달라고 말해버렸다. 부장 입장에서는 ‘내가 먹은 것도 아닌데 왜?’라는 의문을 표했지만 사실 그 입장은 나도 같았다. 아마 내가 그 회사에서 잘렸던 것은 공포증으로 일의 효율이 낮았던 것도 있지만 저렇게 남들한테 밉보였던 것도 확실한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물론 밉보인 것 말고도 일도 참 못 했던 것 같다. 업무 할 때마다 공포증이 오면 아무 일도 못 하고 혼자 속으로 벌벌 떨었다. 혼자 일 할 때는 티가 잘 안 나지만 문제는 회의할 때 일어났다. 기획의 특성상 회의하는 시간이 잦았는데 하필 그때 공포증이 다시 도진 것이다. 그때의 난 회의 시간 도중에 무섭다며 소리를 지르거나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지 않도록 전력을 다 했다. 모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모든 회의를 딴생각하며 무시해 버리는 대담한 신입 사원으로 비쳤을 것이다. 한국은 정신병에 관대한 나라가 아니기에 회사 사람들에게 내 상황을 털어놓고 양해를 구할 수도 없었다. 당시의 부장님한테 ‘죄송한데 제가 공포증이 있어서 회의에 참여 못 했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면 ‘잘 알겠어. 내일부터 회사 나오지 말고 집에서 잘 쉬어’라고 답할게 뻔했기 때문이다. 결국 3개월도 다 채우지 못하고 2개월 만에 잘린 거 보면 말을 했던 안 했던 큰 차이는 없었을 것 같다. 그렇게 나의 첫 회사는 막을 내렸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그때의 상사들과 난 다른 사람인가?’를 생각해봤다. 유감스럽게도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자신이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을 마음속에 품고 남들에게 행하지 말아야 되는데 그 상황에서 벗어났다고 다 잊어버린 것이다. 이미 좀 늦었지만 아직 완전히 늦지는 않았다고 믿고 싶다. 현재까지 이기적인 성격으로 남에게 배려라곤 없었지만, 이제부터 두 번 중 한 번씩은 귀찮더라도 내가 먼저 남들의 편의를 위해 움직이기로 했다. 이기심과 악의로 똘똘 뭉친 이 끔찍한 세상 속에서 나 하나쯤은 이기적임을 좀 덜어내고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