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작된 공(功) 명백한 과(過), 대체 무엇이 논란인가?
1932년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전승 기념행사를 하던 일본 인사들에게 폭탄을 투척한 사건에서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비타 사다지가 폭사했다.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일본의 육군대신이자 관동군 사령관으로, 군에 복무하는 일본인 입장에서는 많이 존경할 만한 인물이었을 수 있다.
백선엽 장군은 친일 행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한국군 최초의 대장이며, 초대 제1군사령관, 육군참모총장으로 복무하며 초기 한국군을 이끈 점에서 구국의 영웅이라며 친일 세력이 칭송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평가가 갈리는 인물인데, 공교롭게도 백 장군의 창씨개명한 이름이 바로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였다.
6·25 직후 국군 지휘부는 패닉 상태에 빠져 아무 지시를 내리지 못했고 각 군단은 무작정 후퇴를 거듭했는데, 대부분의 부대는 제대로 된 편제를 유지하지도 못하고 문자 그대로 패잔병 형태로 뿔뿔이 흩어져 내려왔다.
1사단은 인도교 폭파 때문에 뗏목을 만들어 내려오느라고 다른 부대보다 늦게 퇴각했는데 결과적으로 그나마 편제를 가장 잘 유지하고 퇴각한 부대가 1사단이어서 이후 학도병을 계속 보충받으며 수많은 방어작전에 주력으로 투입됐다. 백 장군은 후퇴와 재편 과정에서 빠른 진급을 거듭하며 현대 세계사에서도 보기 드물게 젊은 나이에 장군이 되었는데, 1953년에는 불과 33세의 나이에 한국군 최초로 대장으로 진급했다.
일단은 백 장군이 1사단장으로 낙동강 다부동 전투를 지휘해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한 것이 최대 업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당시 북한은 광복절 이전까지 대구를 점령하라는 김일성의 지시에 밤낮없이 무리한 진격을 계속했는데 국군과 미군의 합동 작전으로 무려 25일 이상을 버텨내며 확실히 전세를 뒤바꾸는데 큰 역할을 했다.
다부동 전투는 낙동강 오리알이라는 표현이 유래된 전투이기도 하다.
북한군은 이 전투에서 전력을 너무 많이 소진했고 국군에게는 낙동강 방어선을 고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실어주며 이후 전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당시 국군은 끊임없이 후퇴만 했고 가까스로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한 것은 전적으로 미군의 융단폭격 덕택이었지만, 어쨌든 국군이 매우 용감하게 처절한 전투를 펼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백 장군 본인이 적극적인 역할을 한 국방부의 기록에 의하면 하여간 백 장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다부동 전투 때 도망치는 장병들을 모아놓고 내가 앞장서 싸우겠다. 내가 물러나면 나를 먼저 쏘라며 부하들의 후퇴를 막았다는 일화는 전적으로 백 장군 본인의 주장 말고는 근거가 없는 얘기지만 하여튼 매우 유명한 이야기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다수의 북한군은 북으로 이동했지만 상당수가 남부지역의 험준한 산에 근거지를 두고 게릴라전을 벌였다. 일설에는 마오쩌둥이 국공내전의 경험을 살려 김일성에게 남한 후방에 4~5만 명의 군대를 남겨 후방 교란 임무를 수행하면 향후 중공군이 가세한 반격 시 큰 역할을 해낼 것이라고 권고하여 실행에 옮겼다고 하는데, 휴전선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국지적인 소모전만 계속되는 가운데 이들 빨치산이 후방 치안을 교란하여 위협이 되자, 국군은 유격대대와 최덕신 준장의 11사단 등 새로 편성된 부대를 배속해 빨치산 토벌을 전담할 제3군단을 창설했다.
게릴라전의 성격 자체가 원래 심리전적인 요소가 있고, 양민 사이에 숨어서 은폐하는 것도 게릴라전의 기본 중의 기본이지만, 당시 격렬한 전투에 쌓인 북한군에 대한 원한이 부적절하게 표출된 빨치산 토벌 작전은 결과적으로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 무자비한 양민 학살 작전이 되고 말았다.
백선엽은 1951년 말 빨치산 토벌작전의 사령관을 맡아 지리산 등의 빨치산 소탕에 공을 세웠다. 백 장군이 조금 일찍 빨치산 토벌에 동원됐다면 양민 학살 사건의 주범이 되었을 텐데, 이미 거창 양민 학살 등이 문제가 된 상태에서 지리산 포위전에 투입된 백 장군의 부대는 토벌 작전 중 양민들은 되도록 생포하며 작전을 수행했다. 백선엽의 이름으로 투항자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고 신변의 안정을 보장한다는 내용의 삐라를 비행기로 살포하여 수많은 유격대원들이 항복하게 만들기도 했다.
백 장군의 부대도 잔혹 행위와 양민 학살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불필요한 희생을 많이 줄였고, 백선엽은 토벌작전을 마치고 제2군단 재창설 작업을 맡았다.
백 장군은 해방 후 육군본부에서 정보국장으로 재직 중이었을 때, 여순사건 이후 군 내 남로당 숙청 분위기 속에서 사형을 구형받은 박정희의 구명 운동에 적극 나섰으며, 만주 시절 동료들로부터 박정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보증서를 받고 그를 무죄 방면시켜줬다. 뿐만 아니라 백 장군은 불명예제대한 박정희를 정보국에서 북한반 상황실장으로 일할 수 있게 배려해줬고, 심지어 당시 정부에서 예산 문제로 군무원 월급을 보장해줄 수 없다고 하자 백 장군 본인의 판공비 일부를 떼어서 박정희의 월급으로 지불해주는 등 상당히 신경을 써 줬다.
이 인연으로 백 장군은 1960년 대장 전역 뒤 교통부 장관 등 요직을 거쳤다. 백 장군은 30년 동안 전쟁기념관에 사무실을 두고 출근하면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을 맡았는데, 이 기간 백 장군 스스로가 자신에 대한 미화를 역사에 담아냈다는 비판이 있다. 낙동강 다부동 전투는 당시 한국군 5개 사단과 미군 3개 사단이 합심해서 방어를 했는데, 국방부가 편찬한 내용을 보면 마치 백 장군이 혼자 낙동강 전투를 다 막아낸 것처럼 과장됐다는 것이다.
사실 백 장군은 위험한 전투에는 부하들만 앞세우고 뒤에서 전공을 강탈했다는 증언이 끊이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국군이 계속해서 싸우지도 않고 달아난다는 문제 때문에 미군이 백선엽에게 항의하러 갔다가 백 장군의 퍼포먼스를 보고 납득하고 돌아갔다는 야사가 전해지는데, 백 장군은 병사들 앞에서 미군도 이 낯선 땅에서 싸우는데 우리가 후퇴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내가 선두에 설 거니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라 라고 훈시를 하고 직접 권총을 들고 돌격을 했다고 한다. 정말로 사단장이 권총을 들고 선두에서 돌격했다면 매우 어리석은 행동이 아닐 수 없는데, 정말 돌격을 한 것은 아니고 다행히 훈시만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실 무조건 후퇴한 것이 잘한 일이었는데, 당시 국군은 탱크나 중화기를 보유한 게 거의 없었고 북한군은 엄청난 숫자의 소련제 탱크들을 몰고 내려왔기 때문에 국군 자체적인 방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백선엽은 1941년부터 45년 일본 패전 때까지 만주군 장교로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으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토벌에 앞장선 간도특설대에서 1943년부터 45년까지 2년 반 동안 복무한 사실로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됐고, 친일인명사전에도 올랐다.
백 장군은 본인의 간도특설대 경력에 대하여 인정하면서도 한 번도 사과한 적이 없다. 생전에 간도특설대와 관련한 질문에는 정확히 대답하지 않고 얼버무리는 태도를 주로 취했는데, 간도특설대가 상대한 적들이 후방 치안을 어지럽히던 팔로군 유격대 등 중국 공산당계 빨치산들이었기 때문에 죄스럽지 않다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백선엽은 1988년 6월부터 경향신문에 매주 한차례씩 연재하던 회고록에서 스스로 간도특설대 복무 경력을 공개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공과 과를 솔직히 기록하겠다고 발언했으나 간도특설대가 어떤 성격의 부대였는지, 무슨 임무를 수행했고, 어떤 세력과 전투를 벌였는지 등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이후 1990년 <군과 나>, 1992년 <실록 지리산> 등 한국어 자서전을 발행하며 간략하게 간도특설대 경력은 언급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았는데, 오히려 본인이 일어로 써서 일본에서 출판한 자서전에서 어느 정도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1993년 하라쇼보(原書房)에서 출간된 <対ゲリラ戦―アメリカはなぜ負けたか, 대게릴라전-미국은 왜 졌는가?>라는 자서전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간도특설대는 부대장과 중대장의 일부만 일본인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한국인이었다. 왜 만주국에서 한국인 부대가 편성됐는가 하면 이이제이(以夷制夷)적인 발상으로 처음부터 게릴라를 토벌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유일한 한국인 무장집단에 근무한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정예 그 자체였다.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주의주장이야 어찌되었건 간에 민중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평화로운 생활을 하도록 해주는 것이 칼을 쥐고 있는 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간도특설대에서는 대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기분을 가지고 토벌에 임하였다 라며, 스스로 독립군을 토벌한 사실을 자백했다.
2000년 소시샤(草思社)에서 발간한 <若き将軍の朝鮮戦争, 젊은 장군의 한국전쟁>에서 더욱 자세히 서술했는데, 1943년 2월 만주 동부의 한반도에 접하는 간도성에 있던 간도특설대에 전임되었다. 간도성 연길현 명월진에 설치되어 있던 간도특설대는 조래의 국경감시대를 모체로 하여 1938년 12월에 창설되었다. 당초에는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 박격포를 장비한 기박 1개 중대로 구성되어 있었고, 나중에 보병 2개 중대로 증강되어 대대 규모가 되었다.
간도성 일대는 게릴라의 활동이 왕성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계속하여 치안작전을 수행하느라 바빴는데 간도특설대의 본래의 임무는 잠입, 파괴공작이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특수부대, 스페셜 포스로서 폭파, 소부대 행동, 잠입 등의 훈련이 자주 행해졌다. 만주국군 중에서 총검 대회, 검도, 사격 대회가 열리면 간도특설대는 항상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내가 간도특설대에 착임하였던 1943년 초두에는 게릴라의 활동은 거의 봉쇄되어 있었지만 그때까지는 대단했다고 한다. 관동군 독립수비대와 만주국군은 1939년 10월부터 41년 봄까지 여기 동부만주에서 대규모의 게릴라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최전성기의 관동군의 위신을 걸고 철저하게 시행된 작전이었다. 그중에서도 항상 대서특필할만한 전과를 올렸던 것은 간도특설대였다 라고 했다.
백 장군 본인이 서술한 내용을 읽어보면 백선엽은 박정희랑 비슷하게 대일본 제국 황군 정예군에 복무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상당히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것 같다.
주로 만주 지역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 게릴라들을 토벌하는 임무를 맡았던 간도특설대는 원래 독립군 때려잡는 부대라고 유명했지만, 최근 친일의 후예들은 동북항일연군은 중국 공산당의 지휘를 받은 부대이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독립군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백 장군이 활약하던 당시는 반공의 이념이 모든 것을 덮어버려 독립군 소탕 부대에 복무했다는 사실조차도 이것은 사실 빨갱이 때려잡는 부대였다 라고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상황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발간한 자서전에서는 자세한 내용을 설명하지 않은 것을 보면 본인도 이게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인식은 했던 모양이다.
일본군 출신 장교들을 연구해온 박경석 장군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6·25 영웅담이 상당수 날조·과장됐다고 주장했다.
박 장군의 주장에 의하면 같은 일본군 출신이라도 이종찬, 이한림, 김종오 장군 등은 백선엽처럼 간도특설대에 근무하거나 독립운동가들을 토벌한 적이 없으나 과거 일본군 출신이라는 잘못을 구체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했다. 하지만 백선엽, 정일권 등 일본 만주군 장교 출신들은 끝까지 제대로 사과한 적이 없다.
백선엽이 저지른 친일 행위보다 6·25 전쟁의 공을 더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백선엽이 낙동강 다부동 전투에서 크게 활약했다는 주장 자체가 날조다. 6·25 전쟁의 공로를 과장해 스스로 영웅화한 주역은 백선엽 자신이다. 참전하지 않고 당시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이고, 백선엽 장군이 내신 6·25 관련 책이니까 라며 덮어놓고 찬양했으나 참전 장군들은 다 안다. 그분들은 백선엽 장군을 영웅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당시 전쟁기를 통틀어 진짜 영웅을 꼽아본다면 김홍일 장군과 김종오 장군 정도다.
심일 소령과 육탄 5용사 등 백선엽의 1사단 병사들이 개전 초기에 인민군 전차를 육탄 돌격으로 막았다는 주장은 허구다. 이런 조작의 뿌리는 일본 군국주의에 있다. 일제하 초등학교 교과서에 태평양전쟁에서 적의 전차를 파괴하고 목숨을 던진 육탄 용사의 영웅담이 게재됐다. 당시 조선 청소년들에게 그 글에 감동하라고, 혈서를 쓰라고 강요하면서 일왕에 대한 충성을 다짐시켰다. 그 영웅담은 일본 패전 후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백선엽 같은 일본군 출신 장군들이 똑같은 수법을 6·25 전쟁사에서 되풀이한 것이다.
심일 소령에 대해서는, 내가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차장으로 당연직 공적심사위원장을 맡았던 1980년대 1차 조사 당시 이미 허구가 드러났다. 백선엽 장군이 직접 나서서 나에게 심일 소령을 영웅으로 만들자고 이야기했는데, 나는 할 수 없다고 거절하며 그 자리를 나와버렸다. 그런데 3년쯤 지나니까 육군사관학교에서 심일 소령 동상을 세우고 심일상을 제정하길래 내가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더니 백선엽 장군이 참모총장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성사시킨 거니까 그런 줄로만 알고 잠자코 있어달라고 하더라. 역사의식 없는 역대 국방 수뇌부들이 만든 어이없는 해프닝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백선엽 명예원수 추대 등을 추진할 때 박 장군은 백선엽 영웅화 반대 선언문을 발표했고 많은 6·25 참전용사들이 울분을 토하며 합류했다. 박 장군은 죽더라도 잘못된 군 역사 하나는 바로잡고 죽고 싶다. 독립군을 잔인하게 죽인 일제 앞잡이가 대한민국의 초대 명예원수가 된다면 대한민국이 뭐가 되겠나. 대한민국 건국이념은 어떻게 되나. 자칫 북한의 남침이 일제 잔재 소탕 전쟁으로 정당화되면 어떻게 하나? 이걸 바로잡지 않으면 이 나라가 세계적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거다 라는 생각을 이야기했다.
백 장군의 동생인 백인엽 장군 역시 친일파 논란의 중심에 섰던 인물로 창군 원로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지난 2013년 90세로 세상을 떠났다.
백인엽 장군은 이른바 '즉결처분'을 계속 저질러서 부하들로부터 '살인 장군'으로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한 번은 이등병이 운전하던 트럭이 장군인 자신이 탄 트럭을 추월했다는 이유로 트럭을 운전한 이등병 통신병을 직접 쏴 죽였다. 자신의 운전병이 실수로 차 시동을 꺼뜨렸다고 총살하기도 했다.
전화 가설 장비를 잔뜩 지고 가던 통신병이 대열에서 떨어져 허덕이며 걷는 와중에 자신의 행보를 가로막자 통신중대장에게 총살을 명했고, 중대장이 통신병의 손에다 한 방 쏴 버리고 물러서자 자신이 직접 쏘아 죽였다.
훈련 중 자세가 불량하다며 그 자리에서 쏴 죽이는 등 부하들을 죽이는 일이 종종 있어서 이 사람 때문에 군에서는 즉결처분을 금지하고 처벌을 하려면 반드시 재판을 열도록 군법이 바뀌었다고 한다.
백인엽은 1962년 1월 장병 부식 납품업체들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은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했으나 박정희에 의해 10개월 만에 석방됐는데, 이른바 '6군단장 군사 독직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에서 당시 군 검찰부가 밝힌 혐의 내용을 보면 백인엽과 부하들은 장병 부식 납품업자들로부터 당시로서는 매우 거액인 6000여만 환의 뇌물을 받았고, 장병 부식마저 가로채 수만 장병을 영양실조에 걸리게 했다. 6군단장 재직 당시 군납업자들로부터 납품액의 10% 내지 15%를 뇌물로 거둬 1억 202만여 환을 챙겼으며, 6군단 예하부대인 259수송자동차부대에서 매달 자동차 15대 내지 20대씩을 후생 사업에 내보내 1000여만 환을 부정 취득하고, 군단 예하부대에 배급하는 휘발유 중 매달 200 드럼씩 총 1000 드럼을 부정 처분해 500만 환 상당의 이득을 취했다.
백인엽은 석방 후 사학 사업에 전념했는데, 그가 설립한 선인학원은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14개 학교를 거느린 인천 최대 사학이 되었다.
군사독재정권 시절 몸집을 키운 선인학원은 온갖 부정·비리가 끊이지 않았다. 선인학원 소속 학교들이 모여 있는 도화동 캠퍼스 부지는 과거에 많은 중국인들이 살았던 곳이자 묘지촌이었으나 백인엽이 학교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공동묘지를 불도저로 밀어 버리고 중국인들을 위협하여 강제로 내쫓아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건물 안에 수도 시설이나 화장실이 하나도 없고 제대로 마감이 이루어지지 않아 실내에 시멘트 분진이 뿌옇게 나는 등 막장 환경이었다는 점이 문제가 되어 1980년 초 민주화 바람을 타고 인천대 학생 및 재단 소속 고등학생 등이 시위를 하게 되었는데, 1980년 운봉공고·운산기계공고·항도실고 학생 1500여 명이 수업을 거부한 채 운동장에 모여 백인엽 축출, 교내 민주화, 보충수업료 인하 등을 요구하며 농성했다. 당시 문교부 감사에 의하면 1979년부터 선인학원은 9900명을 부정한 방법으로 입학 또는 편입학시켰으며 기부금 61억 원 중 상당액을 백인엽이 횡령했다.
14개나 되는 학교들이 몇 개 안 되는 운동장을 나눠 썼고, 비리 임용으로 수업 능력이 없는 교사가 많았다. 설립자 백인엽의 영향을 받았는지 군대식 문화가 있었는데, 교사들에게 예비군 군복을 입혀서 보초를 서게 하고 순찰을 돌게 했다. 여교사들까지 수통을 착용해야 했으며, 순찰 시 암구호를 대야 했다.
선화여중에서는 도덕 과목 문제로 '위대하신 우리 선인학원의 설립자와 이사장님은 누구인가?' 라는 문제를 출제한 적이 있다.
선인학원의 부정이 문제가 되자 백인엽은 처벌을 피하기 위해 1981년 3월 23일 선인학원을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서약하고 재단 이사장 자리에서 물러났으나 그 후로도 10년 이상 학생 시위와 이사회의 개혁 요구 등을 계속 버티며 배후에서 학원을 운영했다.
1990년 9월 11일에는 선인학원이 부지 조성을 위해 쌓아 놨던 야산 축대가 무너져 23명이 사망하는 송림동 매몰 참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선인학원은 설립자인 백인엽과 그의 형인 백선엽의 가운데 글자를 따서 만든 이름이며, 산하 학교들은 백선엽의 호인 '운산', 백인엽의 호인 '운봉', 어머니의 이름인 '효열', 백인엽 아들의 이름인 '진흥' 등 온 가족의 이름으로 학교 이름을 지었다.
1980년 당시 인천 중고교생의 23%가 선인학원 소속 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당시 동양 최대의 사학재단이었으나 숱한 비리 논란 속에 문민정부 때인 1994년 백인엽이 학교 재산 일체를 인천직할시에 헌납하겠다고 선언하면서 해체되었고, 학원 소속 학교들은 공립으로 전환되었다.
친일 세력은 대체로 백인엽의 비리에 대해서는 인정하면서도 선인학원은 전적으로 백인엽이 장악했고 백선엽은 그다지 관계하지 않았으므로 동생의 잘못으로 다른 가족까지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하지만 백선엽이 꾸준히 많이 보도된 선인학원의 비리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면서도 10년 이상 동생이 부정을 반복하는 행위를 그냥 내버려 뒀다는 것만 해도 확실히 영웅의 행동은 아니었다고 보인다.
또한 백선엽은 예편 전에도 후에도 상당히 정치인이었고 야심이 적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박정희와 전두환의 시대가 이어지며 백선엽이 권력을 잡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의 동생이 온갖 비리를 저지르며 무리한 방법으로 검은돈을 확보하려고 한 것은 어쩌면 형에게 정치 자금을 조달하겠다는 의도였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