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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누나에게

by 즈한

내게는 2명의 누나가 있다. 나이차는 9살이다. 그것도 무려 작은 누나랑. 큰누나는 11살이 많은데, 이런 얘기를 누군가에게 하면 대부분 반응은 비슷하다. ‘와,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겠어요.’ 모르는 사람의 결혼식에 왜 오지 않았느냐고 타박 받은 조세호만큼이나 억울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에 우리 누나들은 이미 사춘기가 한창인 여중생들이었다. 덕분에 나는 친구들이 만화영화를 볼 때, <인기가요>를 봐야 했고, 드라마 <미스터 Q>와 <토마토>를 보며 친구들이 경찰 로봇 ‘다간’의 성공적인 변신을 기원할 때, 나는 남몰래 김희선과의 결혼을 꿈꾸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물론 반항도 해 봤다. 보고 싶은 만화를 보겠다며 떨리는 손으로 채널을 돌렸다가 브라운관 앞에서 내 허벅지가 갈색이 되도록 리모컨으로 맞았다. 리모컨으로 맞는 심정은 오묘하다. 내가 탐하고자 했던 것이 나를 아프게 할 수 있다는 누나의 남다른 교육방식이었다. 또 한 번은 누나 친구들이 걸어온 집 전화를 대신 받고는 방에 있는 누나가 조금 전에 외출했다고 거짓말을 하며 소심한 복수를 했다. 그때는 검은색이 되도록 수화기로 맞았다. 그때 수화기가 검은색이었던 것 같다. 이 집에서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는 독기뿐이었다.


나무꾼이 도끼를 잃은 심정으로 9살쯤 인생을 되돌아보고 있을 때, 성인이 된 큰누나는 내게 잘해주기 시작했다. 스무 살의 멋진 대학생답게 내게 용돈을 쥐여주기도 했는데, 깽값을 받는다면 분명 이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반면, 내가 잘못했을 때마다 잘못한 물건을 손에 쥐고 내게 반면교사를 교육했던 작은누나는 결국 교사가 됐다.


내가 대학생이던 시절에는 다 그렇듯, 돈이 부족했다. 물론 술 사 먹을 돈이었다. 나는 그때마다 누나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큰누나와 작은누나에게 가장 불쌍한 단어만을 골라 동시에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전공서적을 사야 하는데, 교재 값을 착각해서 도무지 수업에 따라갈 수 없으니 2만원만 ‘빌려’달라는 식이었다. 내가 생각한 가장 불쌍한 금액이었다. 멋진 사회인이 된 큰누나는 열심히만 하라며 10만원을 보내줬고, 나는 가족을 대상으로 피싱에 성공한 대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살인교사, 아, 아니 반면교사를 가르치던 작은누나는 늘 이렇게 말했다. 어쩌다 교재값을 착각하게 되었으며, 어쩌다 2만원도 없는 삶을 살게 된 것인지, 앞으로 용돈 자금운용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과 비전을 제시하라는 과제를 내주었다.


당시 나는 경영학도로서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하는 경제학 과제만큼 리모컨을 든 누나의 손이 보이지 않았기에 그 과제를 해냈고 3만원을 받았다. 그리고 경영학의 관점에서 그런 기회비용을 치렀어야 했다면 나는 교재값이 200만원이었다고 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지금도 머릿속을 쉽게 떠나질 않는다.


그런 누나들이 이제는 아들, 딸 낳고 아주 잘 살고 있다. 가족끼리 모여 술을 먹다 해맑은 조카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너네 엄마들의 과거를 말해주고 싶은 마음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데, 누나들의 손에 리모컨과 전화기가 들려있는 것을 보곤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조카들아, 너네는 TV도 안 보고, 집 전화기도 없는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구나.’ 그리고 가끔 누나들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는 매형들을 보고 있자면, 지금도 자꾸만 눈물이 고이곤 한다. 말해주고 싶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제발. 더 늦기 전에 절대, 절대 리모컨에는 손대지 말라고 말이다. 고인 눈물을 닦고 리모컨을 들어 채널을 슬쩍 돌렸더니, 멀리서 누나가 말한다. “야, 지금 그 채널 보고 있는 거 조카라구, 조카. 조카래 조카. 제발 좀 조카라구!”


“응.. 잘못 누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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