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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누나에게 part 2

by 즈한

나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자인 누나를 믿지 못한다. 내게는 9살과 11살 차이 나는 2명의 누나가 있다. 이런 사실을 밝히면,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말한다.


“와 누나가 많아서, 여자에 대해 참 잘 알겠어요.”


부산 사람이니까 매일 해운대에서 수영을 하고 저녁 메뉴는 주로 생선회가 아니었느냐는 말 다음으로 기가 막히는 순간이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지겹도록 6년째 다녔을 즘, 우리 누나들은 모두 대학생이었다. 자연스레 누나들도 연애라는 것을 한 것 같은데, 당시 누나 남자친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막둥이를 데려와 같이 밥을 먹자는 제안을 했다. 아마도 나를 이용해 좋은 이미지를 만들려는 전략이었겠지만, 나는 그들이 우리 누나들을 만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그들이 누나에게 치명적인 약점을 잡힌 것이라 확신했다. 어쩌면 그들은 내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부른 것은 아니었을까.


누나들의 남자친구가 바뀔 때마다 나는 특별한 의식을 치렀어야 했다. 새로운 남자친구를 보러 가기 전 날 밤이면, 나는 내 이름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기억을 지워야 했다. 전 남자친구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날 데려간 곳이 TGI Friday였는지, 베니건스였는지 등이 대표적이었다. 그렇게 나는 누나들의 치밀하고 반복적인 커리큘럼에 의해 내 모든 기억들을 지워야만 잠에 들 수 있었다.


기억상실증에 걸려 자신이 누군인지조차 모른 채 음모와 위협에 맞서 싸워야 했던 <본 아이덴티티>의 맷 데이먼을 보고 오열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나는 끌려온 포로의 심정이긴 했으나, 당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거의 모든 음식을 먹어봤다. 나는 누나의 데이트에 초대된 13살 남동생답게 이게 먹고 싶다, 저게 먹고 싶다는 등의 떼를 쓰지 않았다. 대신 나는 그들이 우리 누나들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는지, 멍이 든 곳은 없는지, 말이 어눌하지는 않은지, 동공의 초점이 명확한지 등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


또한 누나들은 남자친구가 바뀔 때마다, 재빠르게 다른 사람들로 변해갔고 나의 기억은 지워졌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처음 본 누나들의 거짓된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알았다. 여자는, 정확히 말하자면 여자인 누나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내 인생 13년 중 가장 혼란스러운 순간이었고, 나는 이 고민을 혼자 감당할 수 없었다. 당시 출장이 잦으셨던 아버지를 대신해 엄마에게 이 사실을 털어놨다.


엄마는 말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우리만 아는 비밀이어야 한다고. 엄격한 아버지에겐 절대 알려선 안된다고 말이다. 그렇게 나는 아버지가 출장에서 돌아오시는 전 날 밤, 기억을 지우는 의식을 또 한 번 겪어야만 했고, 누나들 뒤에는 엄마가 서 있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한번 여자를 믿지 않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여자인 엄마도 믿지 못하게 되었다.


다시 돌아와 <본 아이덴티티>의 제이슨 본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계속되는 위협에서 자신의 무기를 활용해 위기에서 벗어난다. 그렇다. 누나들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이 내게 무기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후 나는 TV 리모컨을 과감하게 집어 들기도 했고, 피자를 시킬 때 당당하게 포테이토 피자를 시켜주지 않으면 폭로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누나와 엄마를 대상으로 공갈협박을 일삼은 초등학생이 되었고, 생각보다 놀라지 않으신 아버지의 반응으로 나는 리모컨을 다시 내려놓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누나들이 불러주는 것을 종이에 옮겨 적는 특별한 의식을 치렀는데, 아마도 무엇인가를 포기한다는 각서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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