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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tharina Kwon Oct 03. 2021

길과 방향치

독일 유학 생활 에세이

 나는 걷는 것을 참 좋아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길치이자 방향치다. 그런데 사실 '길치'라는 말은 내 스스로 잘 사용하지 않는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길치는 "길에 대한 감각이나 지각이 매우 무디어 길을 바르게 인식하거나 찾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정의는 조금 모호하다. 길에 대한 감각이나 지각이 무디다는게 무슨 말일까? 내 생각에 길을 잘 찾지 못하는 이유는 방향감각과 공간지각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 스스로를 '방향치'라고 말한다. 방향치에게는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나타난다.


1. 모르는 길이다. 처음보는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고 싶다.

2. 나의 직감이 말한다. 이 또는 저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3. 지도를 보고 있지만, 동시에 보고 있지 않다.

4. 지도를 애써 따라가지만 사실 왜 이쪽으로 가야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5. 엄청나게 멀리 온 것 같지만 사실 거기서 거기다.


 게다가 나에게는 놀라운 능력이 한 가지 더 있는데, 가야하는 방향과는 정반대로 가는 능력이다. 나의 직감을 믿었다가 정반대 방향으로 가는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서는 한참 뒤에 알아차린다거나, 지도 안 보고 한참 걷고 있으면 어느새 목적지와는 멀어지고 있다. 다행히도 나이가 먹으면서부터는 낯선 곳에서 지도를 안 보고 걷는 근거없는 자신감도 버린지 오래이고, 이와 더불어 '침착함'을 장착하게 되어, 길을 잃었어도 크게 당황하지 않는다. 이런 경우에는 보통 왔던 길로 되돌아가(다행히 방금 지나왔던 길은 기억하는 편),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최선이다.


 물론 길을 헤매는 와중에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하지만 목적지가 분명할 땐 너무 멀리 돌아가서는 곤란하다. 만약 구글지도가 없었다면, 나는 아마 길찾기에 시간을 허비하는 것도 모자라 결국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독일에서는 이동통신 연결망이 불안정할 때가 많아서 인터넷이 잘 끊긴다. 내가 사는 도시에서 이동중 핸드폰이 안 터지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안 되지만, 낯선 도시에서는 상당히 당혹스럽다. 지난 달(21년 9월)에는 포츠담을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생전 처음 가보는 곳이라 내가 잘 가고 있는지 구글지도를 매번 체크하면서 걸었다. 그런데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려고 어느 인적 드문 언덕배기를 걷던 중, 나는 핸드폰에 "E"가 떠있는 것을 보고야 말았다(인터넷이 안 터지면 LTE가운데 철자 E와 로딩 중 표시만 뜨거나 심한 경우엔 '서비스없음'이라고 뜬다). 나는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도, 어디로 어떻게 가야하는지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문득 관광안내소에서 받은 책자와 지도를 가방 안에 넣어둔 것이 떠올랐다. 역시 아날로그가 답인가. 마음 한 켠은 계속 불안했지만, 그래도 갈림길마다 열심히 종이지도를 해독한 덕분에 무사히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유럽 여행 시에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종이 지도도 함께 소지하는 것이 좋다.


 방향 감각은 아무래도 타고나는 것 같다. 여행을 많이 해본다고 해서 더 나아지지는 않는다. 새로운 곳‧낯선 곳에서는 여전히 길을 잘 못 찾고, 방향도 잘 못 잡는다. 그런데도 나는 이상하게 어디든 걷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사진 찍을 때에는 유독 길을 많이 찍는다. '더 나은 길' 또는 '새로운 길'에 대한 열망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지나 온 길을 돌이켜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일까? 


 지도앱을 끄고 주변을 둘러보며 목적 없이 걷는 것은, 때로는 복잡한 생각을 비울 수 있게 해주고,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 환경을 미적으로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다만 돌아는 와야 하므로, 허용되는 시간 범위와 확실한 이정표를 마음 속에 확보해 두어야 한다. 그래야 길을 헤매고 있다는 불안과 스트레스가 없다. 아는 길에서 모르는 길로 루트를 확장할 때의 희열과, 반대로 모르는 길에서 아는 길로 다시 진입할 때의 안도감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방향치의 특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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