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믿지 않는 것 투성이.
아직 어린애처럼 굴던 애매한 몸과 머리.
그런 사람이었다.
이를 테면 사랑이랄지, 낭만, 유령, 우정, 예언같은
것들.
형태없이 손에서 녹아버리는, 불필요한 망상과 기분으로 이루어진 것들을 믿지 않았다.
어김없이 여름은 찾아왔고 불신을 가득 품은 인간은 그저 그대로, 여전한 모습으로 방학을 맞이했다. 방학은 지루하다. 조용한 시골을 관통할 만한 이벤트같은 것은 없었고 반짝임이란 고작해야 불꽃축제날의 하늘 정도. 풀벌레 소리, 매미 울음, 때때로 번지는 서늘한 그늘, 몇 번이고 반복해 읽은 책들. 그 정도가 내겐
흥미거리였다.
나는 마치 집을 지키는 개처럼 대부분의 날을 집에 있었다. 뻔한 인물- 그건 나를 가리키는 말인지도 모른다. 몸이 약해 걸핏하면 쓰러졌다. 체육 수업과 운동회에 늘 제외되는 사람은 다름이 아닌 나였고 차가운 그늘 아래는 언제고 독점 가능했다.
나는 살아 있음에도 모든 방면에서 희미했다.
물에 닿으면 투명해지는 산하엽처럼 손과 발을 내려다보면 바닥이 비칠 것만 같았다.
그 때의 여름도 마찬가지였다. 누나는 친구를 만나러, 부모님은 일을 하러 나가 남은 건 나 혼자. 쓸데 없이 큰 집은 더위 대신 냉기를 잔뜩 머금어 찼다. 옅어져 감이 느껴졌다. 존재라든가 숨 같은 것.
한 평생 이런 따분한 매일이 반복되리라 생각했다. 창으로 마당을 바라보며 종이나 넘기리라고. 비실비실대다 죽어버릴 것이라고 말이다. 너무 공기를 많이 쐬어버린 날이었다. 한 밤 중 고열로 앓았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거실 한구석에서 시들어가는 화분처럼 가쁜 숨이 헉헉, 울대를 타고 올라왔다.
사실 알아채지 못한 게 아닌가, 구태여 부정을 향해 머리를 누인 적이 없는데 그 날따라 멈출 줄을 모르고 몸이 향했다. 아마도 태어나 쭉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버려졌다고. 처음부터 버려졌던 것을 나만이 모르는 척 하고 있었던 거라면-.
필요 이상의 잡념은, 그리고 감정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도움되지 않는다. 역시 그랬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깨닫는 순간 괴로울 걸 뻔히 알면서 주르륵 흘려버리는 눈물은 애새끼만 같다.
인간이고 싶지 않다, 생각이 활자로써 제 존재감을 박으려 애썼다. 나가줘 나가줘, 거품같은 혼잣말이 가슴 안에서 커졌다.
손이었다. 몹시도 차가운. 희끄무레한 연기가 눈물에 불어터진 각막 밖에서 왔다 갔다를 반복했다. 그 연기는 내가 바라볼수록 선명해졌는데 아무래도 연기의 끝자락이 왼손인 듯 했다. 모든 시작은 불시에 예고도 없이 시작된다는 걸 그 때 깨달았던 것 같다.
식은땀에 젖은 앞머리 그 위를 쓰다듬는 손... 구름이 걷어지고 달빛이 스며들었다. 방 안은 해상도를 높인 텔레비전처럼 분명해졌다. 구릿빛의 마른 손, 길게 뻗은 팔 점점 형태가 잡혀간다. 가느다란 목 위로 보이는 얼굴, 그건 내가 무시해온 감정의 집합이었다.
나는 그 존재를 믿으려고도 믿지 않으려고도 하지 않았다.내면 가장 바닥에서 나는 그것을 어떻게 대하고 싶은지 분명했지만 일기에도 거짓말을 써 버리는 애처럼 굴었다. 마음의 거칠거칠한 면에는 중도에 서 있길 원하는 내가 멋대로 떠들었다. 애를 썼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가로로 긴 눈이 촉촉히 빛났고 흐린 시선이 점차 내게 고정되었다. 그것 역시도 나를 보았다. 책에서 본 구절이 떠오른다. '죽기 직전에야 느낀다는 감각을 때때로 너를 보고 느꼈다.' 라던.
그 마른 손은 이튿날에도 나를 찾아왔다. 더 이상 아프지 않은데, 그렇다고 날 가엾이 여기는 것 같진 않은데 마냥 자연스러웠다. 흐르는 바람같았다.
은밀히 쪽지를 주고받던 이들이 있었다. 책상 위로 날아든 쪽지를 펼쳐 작게 웃더니 어느샌가 함께 하교를 했다. 비밀스러운 뒷모습을 본 적이 있다. 주제도 모르고, 전혀 그런 상황이 아닌데도 참 이상하게, 나는 그들을 떠올리며 제멋대로 이입해 버렸다.
일주일 내내 그 손은 빠짐없이 나를 찾아왔다.
밤이면 꼭 닫힌 문 안쪽에서 바보같은 당신의 아들이 정체모를 존재를 기다려요, 라고 소리치고픈 충동이 들 지경이었다. 말을 걸고 싶어졌다. 사라질 것 같았다. 하지만 말을 걸어도 사라질 것 같았다.
그건 대낮의 일이었다. 조각난 햇살이 온 사방에 박혀 평소보다 더웠던 날, 그것이 내 옆자리에 불쑥 나타났다. 마루에 나란히 앉아 정원을 바라보는 자세로 갑작스레.
깡통을 팔에 끼우고 논밭에 박혀 사는 역에 충실해온 사람더러 모든 게 가짜였다고 훼방 놓으려는 듯이 나타난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몹시도 태연한 얼굴로 휘둥그레해진 내 안을 바라보았다. 시리게 부신 햇살 밑은 달 아래와 달리 사악해서 그것의 눈 아래까지 분명하게 비추었다. 내가 그것을, 내가 이 애를 기억해 버리게.
많은 것이 퇴색되고 흐려졌지만 갈수록 선명해지는 것은 있게 마련이다. 영원히 가슴에 묻어 잊을 수 없는 기억. 그게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존재했는지 아니었는지는 결코 중요치 않고.
잊을 수 없는 것은- 또한 진실로 소유했던 것은 까무잡잡하고 마른 얼굴 위로 어린 늑대같이 형형했던 눈빛과 작고 날렵한 코, 나를 안주하게 만드는 입술과 뱉어지는 마음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점점 학교로 도피해버리는 날을 기다리지 않았다. 밤이고 낮이고 억지로 눈 뜨고 마는 시간과 억지로 잠들어 버리는 시간의 경계는 불분명해졌다.
단단한 팔이 부러웠다. 튼튼한 다리가 부러웠다. 어느 날은 내 손을 잡더니 마을의 바닷가로 달려갔다.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시간, 하늘의 색도 무엇을 토해야 할지 알지 못해 미묘한 색으로 덮여 있던 때에 그 반짝이는 미소 하나만으로 모든 걸 패배하게 만들었다. 나를 마구 끌고 가 버린 그는 커다란 바위 위에 올라 다시 손 내밀었다. 이대로 빠져 버려도 좋을 것 같다는 그런 바보같은 진심을 삼키고서 조심히 붙잡았다. 멍울같은 하늘이 얼굴에 드리워졌다. 마음이 괴물처럼 커지고 커지고 커지고...
함께 숙제를 했던 날, 평소라면 먹지도 않을 간식을 가져와 나눠 먹던 날, 비가 쏟아졌던 날, 배 위로 구겨진 나시 티가 유난히 시선을 빼앗던 날. 목으로 흐르는 음료수의 끈적거림과 무릎을 데우는 그의 머리 따위가 여름이란 말 하나로 응축됐다.
단 한줄, 어떠한 흔해빠진 표현으로 뒤죽박죽이던 일 모두가 정리되고 말았던 해.
비어있던 네모칸에 빨간 엑스자가 늘어나기 시작했을 때, 밤의 온도가 달라졌을 때 나는 밤 중에 그를 불렀더랬다.
둘 곳을 몰라 방황하던 시선은 눅눅한 이불 위를 밟는 그의 발로 향했다. 반바지 아래 쭉 뻗은 다리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천천히 그를 바라봤다. 흔들리는 속눈썹 아래서 붙들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바라건대 숨 멎지 않길, 이런 황당하기 짝이 없는 소원을 품고서 우리 사이에 흐르는 무성 음악을 들었다.
모든 끝은 불시에 예고도 없이 벌어지고 만다는 사실을 깨지는 통증과 맞바꾸어 깨달았다. 한 밤의 달빛은 조금 차가워졌다. 열은 더 이상 오르지 않았고 눈 앞이 흐려져도 그대로 두어야만 했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소리내어 봤자 그다지 쓸모는 없었다. 아프다는 말이 다른 의미일 수 있구나 알았다. 작아지는 아지랑이와 함께 도망간 열대야는, 나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어디로 가 버린 거지?
나처럼 약해빠진 이를 또 어디선가 찾기라도 하는 것인지 물을 수만 있다면 묻고팠다. 그 마른 손이, 새까만 머리카락이, 이불 위를 오가던 발이 어디로 갔는지 나는 보고 싶어.
여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언덕을 넘어 사라졌다. 너무도 분명한 노을색에 삼켜졌다. 내 방학은 여전히 그 방 안에 있는데. 모든 걸 그 이불 위에 둔 채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