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 하는 사람들

누군가 내 핸드폰 좀 뺏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by 김구름

대표는 하루에 몇 통의 전화를 받을까?

핸드폰을 열어 바로 확인해 본다. 오늘은 업무 전화를 하나도 안 했고 어제는 8번을 했다. 주말에는 5통을 했다. 25통을 한 날도 있다. 그날은 그냥 하루 종일 전화만 한 거다. 물론 모든 업무 전화가 나의 개인 핸드폰으로 오는 것도 아니고 외부 업무도 전화보다는 이메일이나 카톡으로 훨씬 많이 진행되기 때문에 통화 횟수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지만 회사에 있을 때 충전을 하지 않고 있으면 불안한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통화 횟수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물리적으로 회사에 있지 않아도 업무를 할 수 있는 너무나도 일 하기 좋은(?)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메일과 전화부터 슬랙에 카톡까지 언제 어디서나 일을 할 수 있다. 심지어 인터넷이 안 되는 곳도 없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제주 산간 지역, 한라산 꼭대기에서도 우리나라의 미친 인터넷은 세계 탑 급이다. 정보도 너무 빠르다. 어제 이 사람에게 했던 이야기가 오늘 다른 사람의 입에서 들린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뉴스창이 뜬다. 이 회사가 어디와 계약했는지, 저 회사가 아직도 운영 중인지, 그 대표가 어디 출신인지 정보를 찾는 일은 일도 아니다. 필요 없는 정보도 너무 많다. 못 받은 돈 대신 받아주겠다는 전화부터 정부 자금 소개해주겠다는 컨설턴트들, 신규 채용 안 한다고 했는데 신규 채용 계획이 없는지 잡코리아는 왜 이렇게 자주 전화를 하는 걸까. 이 피곤한 정보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지만 그렇다고 나에게 핸드폰을 보지 않고 반나절을 버틸 깜냥은 없다. 그래서 핑계가 필요했다.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일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확 내 핸드폰을 낚아채 멀리멀리 날아갔으면 했던 것이다. 그래서 진짜 억울하다는 탄성과 함께 내가 일을 안 하고 싶어서 안 한 게 아니라 누가 내 핸드폰을 뺏어가서 일을 못한 거라고 핑계 대고 싶었던 것이다.


3~4년 전 갑자기 무언가에 홀린 듯 러닝을 시작했다.

러닝이 하고 싶어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대표들 모임에서 '런데이'라는 앱을 알게 된 것이 시작이었는데 실제로 그 앱은 UI, UX 설계를 참 잘한 앱이었고 나는 앱을 테스트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하기를 눌렀을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한두 번 달리기를 하다 말 것이라 예상한 것과 다르게 몇 달 후 30분을 쉬지 않고 뛰더니 어느새 하프 마라톤을 뛰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달리는 동안 핸드폰과 멀어졌다. 30분이고 한 시간이고 나는 달리는 동안 이메일도 안 보고 뉴스도 안 보고 카톡도 안 보고 전화도 안 받았다. 기뻤다. 자유로워진 듯했고 마음이 가벼웠다. 몸도 마음도 건강해졌는데 그것보다 내가 얻은 더 큰 이득은 사업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었다.


사업은 달리기와 비슷하다.

1. 일단 이 둘은 생각보다 지독하리만치 혼자와의 싸움이다. 경쟁자가 있어서도 안되고 있으면 더 탈이 나는 종목이다. 내가 경쟁할 수 있는 건 어제의 나, 지난해의 나 정도가 되겠다. 다른 사람이 얼마나 빨리 뛰는지, 기록이 무엇인지는 나에게 중요한 정보도 아니며 하등 도움도 안 되는 정보다. 오히려 내 자세, 호흡, 내가 어딜 보며 달리는지, 무슨 음악을 듣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가 승패(랄 것도 없지만)를 좌우한다.

2. 속도는 중요하지 않다. 친구가 5'00을 뛴다고 5'30을 뛰던 내가 갑자기 5'00으로 한 시간을 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실제로 대회에서 나보다 더 빠른 내 앞의 사람을 쫓아 따라잡다가 바로 숨이 차 원래 뛰던 속도도 못 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사업도 그렇다. 역량도 없는데 유행하는 사업을 따라 하다 탈이 나는 경우, 여유도 없는데 인력을 채용하다 회사가 휘청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낼 수 있는 속도가 무엇인지, 내 바로 앞의 걸음을 언제 어디에 내딛을지 그 시간과 거리를 아는 것은 대표자의 중요한 능력이다.

3. 근육이 필요하다. 나는 그냥 전체적으로 근육이 없는 몸이었기에 뛰고 올 때마다 복근과 엉덩이가 아팠다. 좋은 자세로 오래 달리려면 근육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고 웨이트를 시작했더니 부상도 줄고 피로감도 줄고 회복하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강한 자가 버티는 것이 아니라 버티는 자가 강하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사업도 정신력이 아니라 체력으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체력에서 정신력이 나오고 인성이 나오기 때문이다. 짜증이 잦거나 인내심이 없거나 말이 곱지 않은 사람은 근육이 부족한 사람이다.

4. 휴식이 필요하다. 러닝도 매일 하지 않는다. 몸이 회복하는데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회사에도 휴가라는 것이 있다. 일에서 벗어나 환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 선택이 아니다, 필수다. 내가 좋아하는 말이 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수익성 높은 일은 리더인 자신을 돌보는 일이다'. 우리들은 참 스스로를 돌보지 못한다. 리더일수록, 열심히 하고 성과를 잘 내는 사람일수록 본인을 돌보는 데에 소홀한 경향이 있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휴식을 취하자.

5. 슬럼프가 온다. 러닝이 예전처럼 재밌지 않은 순간이 온다. 회사의 성장 그래프가 꺾이는 순간과 비슷하다.

6. 코칭은 도움이 된다. 러닝이 생각보다 ‘저렴한' 운동이 아니라는 것을 러너들은 다 알 것이다. 일단 러닝화 종류도 어마무시하게 많은데 거기에 옷(상의, 하의, 속옷, 겉옷), 선글라스, 모자부터 마스크, 슬리브, 벨트, 뭐 보틀 백 등 난리가 난다. 내가 생각하기에 진짜 문제는 러닝 제품들의 가격이 다른 운동 기어들에 비해 아주 비싸지 않다는 데 있다고 본다. 조금씩 야금야금 사다가 진짜 선수 데뷔 해야만 할 것 같은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거기에 러닝 클래스, 개인 레슨 등이 붙으면 갑자기 가격이 기하급수적으로 오르는데, 이것들은 (안타깝게도) 실제로 도움이 된다. 사업도 마찬가지다. 혼자 해도 된다. 하지만 주변의 도움이 있으면 훨씬 빠르다. 좋은 파트너를 구분하는 안목이 중요해진다.

7. 혼자보다 여럿이서 할 때 더 잘한다. 여의도, 한강 일대를 크루들과 자주 달렸다. 제각기 페이스가 달랐기 때문에 비슷한 페이스대 사람들과 같이 뛰었는데, 서로 파이팅 해주고 페이스 맞춰 속도를 내주는 게 놀랄 만큼 힘이 된다. 혼자 뛰는 것보다 확실히 속도가 나오고 자세도 좋다. 오래 뛰어도 덜 지친다. 내가 사업을 혼자 했더라면, 처음부터 지금까지 같이 뛰어주는 우리 이사님과 팀원들이 없었다면, 나는 이렇게 일을 오래 하지 못했을 것이다.


러닝 하는 사람들이 있다.

요란하게 한두 번 하고 마는 사람들이 아니라 조용하게 꾸준히 달리는 사람들. 러닝이 시작하기는 쉬워도 계속하기는 어려운 운동인 만큼 내가 만난 러닝 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참 멋진 ‘러닝 하는’ 이유들이 있었다. 가끔 우연히 '저도 달리기 좋아해요'라는 분들을 만나면 설렌다. 얼마나 많은 호흡을 셌으며 얼마나 많은 생각을 정리해 왔을까. 나도 다시 시작해야지. 오랜만에 구석에 있는 러닝화를 꺼내 신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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