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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닉 Oct 30. 2022

고독과 프리라이팅

생각을 녹화하다

고독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손이 자유로우면 어느새 스마트폰을 만지고 있었다. 고독 역량이 낮을 때는 손이 묶이지 않으면 고독에 빠지기 어렵다. 그래서 운전, 설거지, 산책이 좋은 방법이 된다. 이런 것들을 여기서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겠다. 대신 나는 더 큰 효과를 본 방법을 소개하려고 한다. 손이 묶이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이다.


하버드 글쓰기 강사 비버라 베이그의 저서 <하버드 글쓰기 강의>를 통해 ‘프리라이팅 free writing’을 알게 됐다. 프리라이팅이란 종이와 팬을 준비한 뒤 생각을 날 것 그대로 쓰는 것이다. 마치 생각에 녹화 버튼을 누른 듯이 말이다. 쓰는 순간 모든 생각이 기록된다. 맞춤법이나 문장은 신경 쓰지 않는다. 뒤로 돌아가 고치지도 않는다. 그런 행위는 생각을 뚝뚝 끊기게 만든다. 생각에서 맞춤법을 신경 쓰지 않는 것과 같다. 손은 그냥 생각을 반영하는 것뿐이고, 생각이 다른 길로 빠진다고 해도 그대로 쓴다. 종이와 펜이 아닌 메모장과 키보드도 가능하다. 나도 컴퓨터로 하고 있다.


우리가 글쓰기를 싫어했던 이유는 잘 써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었다. 기승전결이 있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누군가 볼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런데 프리라이팅은 그런 압박, 부담, 두려움이 없다.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작할 수 있다.


프리라이팅은 생각을 행동으로까지 참여시키기 때문에 몰입도가 뛰어나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3자의 입장으로 볼 수 있다. ‘아,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 ‘내가 이런 아픔이 있구나..’ 그러면서 좀 더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펼쳐진 글 속에 내가 놓친 내면아이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있을 수도 있다.


생각 중 흐름을 놓쳐 본래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프리라이팅을 하면 그럴 일이 없다. 앞에 써놓은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하던 주제로 쉽게 돌아와 이어갈 수 있다.


비버라 베이그는 프리라이팅을 글쓰기 훈련이라고 말한다. 글쓰기란 생각의 표현 방식이므로 프리라이팅을 생각 훈련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책에서 이런 얘기를 한다.


“프리라이팅은 여러분의 창조적 기능을 위한 유산소 운동 같은 것이다. 멈출 필요가 없고, 자신이 쓰는 글을 아무도 읽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창조적 기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


그렇다 유산소 운동과 같다. 운동을 계속하면 지구력이 늘듯이 집중력이 늘어난다. 점차 손에 키보드나 팬이 없어도, 생각에 집중하는 게 익숙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글을 아무도 보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 볼 거라는 생각이 들면 생각을 날 것 그대로 꺼내 놓을 수 없다. 머릿속은 비밀 공간이기 때문이다. 누굴 만나서 대화하던 블로그에 글을 올리던 생각 그대로를 내비치진 않는다. 그러므로, 아무도 볼 수 없는 컴퓨터 메모장에 작성하던지, 열쇠가 있는 서랍에 넣을 수 있어야 한다. 영 불안하다면 쓴 다음 삭제하거나 파쇄기에 넣고 갈아버릴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쓰는 행위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 책, 영화 등이 좋든 나쁘든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면, 프리라이팅을 한다. 그러면 머릿속이 정리되고 기존에 알고 있던 지식과 융합하여 나에게 흡수된다. 원인 모를 감정이 들 때도 프리라이팅을 한다. 그러면 그 원인이 모습을 드러내 내 눈앞에 포착된다. 포착되는 순간 그 감정은 사그라들거나,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생각할 수 있다.


이 책에 지난 경험을 쓸 수 있는 것도, 2년 넘게 쌓아온 프리라이팅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제된 글은 경험의 주요 골격만 남아있는 구조물과 같다. 당시 벽은 어떤 색깔이었는지 인테리어는 어떻게 되어있었는지 떠올리기 쉽지 않다. 그러나 프리라이팅은 당시 건물의 분위기가 온전히 보존된 건물과 같다. 당시의 감정과 잡생각들이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프리라이팅을 하나의 명상법이라고 봐도 좋다. 프리라이팅을 끝내고 들여다보면 마치 두 명이 대화한 듯, 질문과 답변들이 있을 것이다. 성인자아와 내면아이가 대화하기 때문이다. 내 손은 내면 토론회를 받아 적는 서기(書記)와도 같다. 그런 과정을 통해 두 자아는 자신들이 했던 말들을 돌아보며, 더욱 역량 있는 토론자로 성장할 수 있다. 그렇게 고독 역량이 향상되고, 자신과 더욱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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