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받아들이는 자세
클럽장님과 여행을 다니며 느낀 게 있다. 생기가 넘친다는 것이다. 호기심이 많고, 자연에 한없이 감탄한다. 함께 산행하는 와중에도 “주훈 씨 정말 신기하지 않나요? 우와~ 와 좋다"라는 얘기를 많이 했다. 아스팔트에 앉은 나비가 왜 거기에 있는지, 새들은 새벽에 어찌 그리 지저귀는지, 소나무는 왜 저런 모양으로 자라는지, 돌은 어찌 저렇게 깎였는지에 대한 경이와 궁금증은 끊이질 않았다. 그럴 때 보면 해맑은 아이처럼 느껴진다.
반대로, 금오도 펜션에서 일하는 아저씨는 모든 것을 따분해했다. 클럽장님과 동년배로 보였다. 여객 터미널에 차로 우리를 데리러 왔을 때, 클럽장님은 여느 때처럼 먼저 말을 걸었다. 창문 밖 풍경을 보며 금오도가 정말 아름답다고 말했는데, 돌아온 아저씨의 대답은 우리를 무안하게 만들었다.
“다 똑같은 산이고 바다인데, 뭐가 이쁩니까"
다음날 우리가 금오도 비렁길을 걷기를 끝내고, 아저씨가 데리러 왔을 때였다. 절경을 보고 가슴이 벅차 있던 우리는 본 것들을 신나게 얘기했다. 그러나 그분은 어제와 동일하게 비렁길에 별로 볼 게 없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당연히 비렁길을 돌아본 적이 있다고 가정하고 클럽장님이 다시 물었다.
“어느 비렁길 코스를 가장 좋아하시나요?”
그 아저씨가 답했다.
“비렁길을 돌아본 적 없습니다.”
펜션 아저씨가 어떤 사람인지는 내가 다 알 수는 없다. 그렇지만 클럽장님 같은 자세를 가지는 게 더 행복하리라는 확신은 들었다. 자연에 감탄하고 호기심을 가지는 클럽장님의 삶은 풍요로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도 동일한 태도를 보인다. 독서모임 때마다 그 사람이 어떤 한 달을 어떻게 보냈는지를 궁금해하고, 주의 깊게 듣는다. 누군가가 모임에서 “그냥 뭐 일하고 똑같은 한 달을 보냈죠"라고 말하면 아쉬워하는 게 눈에 보인다.
사람들은 모두 가슴에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형성된 성인자아가 너무 커져서 그것을 억누르고 있다.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창의적 자세의 전제 조건은 무엇일까? 첫 번째 조건은 감탄하는 능력이다. 아이들에겐 이런 능력이 있다. 아이들은 새로운 세상에서 갈 길을 찾고 항상 새로운 사물을 붙잡아 알아가려는 노력을 다한다. 또 아이들은 당황하고 놀라며 감탄할 수 있고, 바로 이를 통해 창조적으로 응답할 수 있다. 하지만 교육과정을 거치고 나면 대부분은 감탄하는 능력을 잃는다. 이제 자신은 사실상 모르는 것이 없으며, 감탄은 배우지 못한 증거라 생각한다. 세상은 더 이상 기적으로 가득하지 않고 사람들은 세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여기서 프롬이 말하는 창의적인 삶은 특별한 재능이나, 예술가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삶을 대하는 자세를 말한다. 누구나 도달할 수 있고 도달해야 하는 자세다. ‘산'을 산이라는 단어로서만 인식하는 게 아닌, 다채롭고 아름다운 색깔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자세 말이다.
창조성을 잃은 우리는 얼마나 건조한 삶을 살고 있는가? 사람을 볼 때도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 둥 몇몇 사회적 특징들만 알면 그 사람을 안다고 생각한다. 자연을 봐도 다양한 것을 보지 못한다. 자연은 바람에 따라 다른 움직임을 취하고, 햇빛이 어느 각도로 내리쬐냐에 따라서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또한, 한 사람은 얼마나 다양한 것들을 담고 있고, 역동적으로 변해가는가?
우리가 돈을 소비하는 형태로 행복을 느끼려는 이유는, 창의적인 자세가 없기 때문이다. 소비로 자극을 채우는 삶은, 무뎌져 더 큰 강도의 소비를 찾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럴수록 더 큰돈이 필요해지며, 돈을 벌기 위해 일에 매몰된 삶을 살아야 한다. 참 아이러니하다.
순수한 호기심을 가진 부분은 내면아이의 역할이다. 창조적인 자세는 내면아이와의 유대감에서 나온다. 용기를 얻은 내면아이가 자신감을 가지고 현실 세계에 직접 발을 내딛게 된다. 그런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어린아이 같은 면모를 보인다. 고독을 통해서 내면아이를 자신의 외면적 삶과 융합시켜야 한다. 성인자아의 지지를 받은 내면아이는 마음 편하게 세상에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할 수 있다.
실제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를 다루는 애착 이론에 따르면, 어머니의 사랑을 받는 아이는 세상을 탐구하는데 더 적극적이다. 호기심을 잔뜩 머금은 생명체가 되어, 보이는 것마다 만져보고 입에 넣어도 본다. 세상에 푹 빠져 오감을 통해 교감한다. 이 과정에서 넘어져도 개의치 않고 일어나서 하던 탐구를 계속한다. 뒤에는 든든한 지원자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이는 불안하고 위축된다. 세상에 호기심을 가지기 어렵고, 소극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의지할 부모가 없기 때문이다.
생리학적으로도 확인된다. 내면이 안정된 사람의 몸에는 변화가 일어난다. 미주신경은 몸 전체에 긴장을 풀라고 명령한다. 심장은 속도를 늦추어 안정된다. 소화기관은 순조롭게 움직이며 영양소를 잘 흡수한다. 폐도 완화되어 더 많은 산소를 들이마신다. 미소도 얼굴 근육의 완화로 자연스러워지고 목소리도 후두의 영향으로 부드럽게 나온다. 청력도 중이 근육의 영향으로 향상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몸은 외부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참여 모드로 바뀐다. 사람도 매력적으로 변한다. 그렇게 세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고, 배움의 자세를 갖추게 된다.
일과 미디어에 매몰돼있는 상황에서는 세상을 받아들일 여력이 없다. 시간이든 정신이든 과부하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몸은 방어 모드로 바뀐다. 얼굴의 근육은 굳게 되고, 웃어도 어색하고 불안해 보인다. 뭐든지 빨리 판단하려 하고, 맥락을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는다. 미지의 것, 불확실한 것을 마주하기를 두려워한다. 그렇게 배움의 자세를 잃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