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대 가슴의 대화
성과사회, 주의력 산업과 함께 우리를 고독에 빠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바로 덧없는 관계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에세이 <원칙 없는 삶>에서 이런 말을 한다.
“우리의 내면적인 삶이 실패할수록 절박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우체국을 들락거릴 뿐이다. 수많은 편지를 들고 우체국에서 나오며 지인이 많다며 자부심을 느끼는 어리석은 자는 오랫동안 자기 자신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공허한 마음에 시끌벅적한 모임에 나가 술을 마시고 논적이 있을 것이다. 또는 누군가 불렀을 때 거절하면 소외될까 두려워 나간 적도 있을 것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SNS 친구를 맺어본다. 그러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어떤 마음이 들었나? 더 공허한 느낌이 들진 않았나?
공허한 마음이 드는 이유는, 가장 친해져야 할 존재인 자신을 외면하고, 외부에서 공허함을 메꾸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껍데기뿐인 관계들로 말이다. 그런 관계는 소금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더 갈증만 나게 된다. 점점 외부에 더 의존하게 되고 만남을 갈구하게 될 것이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부담을 느끼고 나에게서 떠나간다.
자신과의 유대감이 탄탄한 사람은, 어딜 가도 외롭지 않다. 항상 혼자 있는 게 아닌 자신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으며, 관계와 관심을 갈구하지도 않는다. 역설적으로 이런 사람이 매력 있다. 깊은 곳에서부터 여유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사랑할 수 있을까? 에리히 프롬은 한국 스테디셀러인 <사랑의 기술>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자립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집착한다면, 그 또는 그녀는 생명을 구조하는 자일 수는 있지만 그 관계는 사랑의 관계가 아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조건이 된다.“
여기서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사랑’은 이성 간의 사랑만이 아닌 더 넓은 의미를 가진다. 당연히 우정과 가족애도 포함된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전제 조건이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했다. 인류 최초의 자기계발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는 훌륭한 사람은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사랑은 대상이 아닌 태도이기 때문이다. 자신과의 사랑을 쌓은 사람은 다른 사람도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관계는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 사람은 단순히 향락적인 즐거움이 아니라 성장으로서 만족감을 느낀다. 좋은 관계는 만나서 가슴 대 가슴으로 대화한다. 그런 대화는 생각에 빠지게 만들며, 자신을 성장하게 한다. 그런 관계 몇 명만 있다면 충만한 삶이 될 것이다.
나의 경우는 대표적으로 클럽장님과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가끔 클럽장님 동네에 가서 함께 산책하곤 한다. 클럽장님과의 대화는 이따금 나를 깊숙한 고독으로 밀어 넣는다. 그렇게 대화 중간중간 기분 좋은 침묵들이 생긴다. 집에 돌아오면 큰 만족감이 든다. 내가 확장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좋은 만남을 가지기 위해서는 고독한 시간이 필요하다. 고독은 자신의 맛을 내는 생각의 발효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식을 지혜로 바꾸는 과정이다. 그래야만 자신의 이야기가 생긴다. 고독을 거치지 않은 이야기는 어디서 얻은 정보를 자신의 입으로 되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는 진정성 있는 대화가 오가기 쉽지 않다. 고독과 좋은 만남은 마치 단짝처럼 연결되어 있다.
얼마 전 고향인 울산에 내려갔을 때, 두 경우의 만남을 겪었다. 하루는 본가에서 친구랑 통화를 하다 너무 재미있어서 이렇게 말했다.
“야 그냥 만나서 얘기하자, 내가 지금 네 가게로 갈게"
친구의 가게는 마감 시간이 다 되어 여유가 있었다. 술 한잔 없이 몇 시간 동안 깊은 대화를 나눴다. 친구의 얘기들은 나를 생각에 빠지게 만들었고, 나도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를 건넸다. 친구를 집에 바래다준 후, 가슴이 충만해진 상태로 집에 돌아와 행복하게 잠이 들었다. 며칠이 지나 서울로 올라갈 때 친구에게 이런 카톡이 왔다. ‘네 생각을 공유한 게 내 생각에도 영향을 미쳤어, 생각을 앞으로도 기대하고 지지한다.’ 정말 고마웠다. 나도 친구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서로가 서로를 넓혔다.
바로 다음 날이었다. 친구 한 명을 만나자마자 술로 시작했다. 하나둘 친구들이 모였고, 약간의 어색함에 가벼운 얘기 등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1차, 2차를 지나 3차는 노래타운으로 갔다. 대화 없이 노래만 부르다가 밖으로 나왔다. 그래도 각자가 뭔가 아쉬움 있었나 보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대화 같은 대화가 없었으니 말이다. 4차 호프집으로 갔다. 그런데 더 이상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나도 취하고 친구들도 취했다. 내일이 되면 기억나지도 않을 한탄을 하는 친구도 있었다. 모임이 끝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어제보다 만난 사람 수는 많았지만 그것에 비례해 가슴이 충만해지지도 않았다. 집에 도착해 생각을 곱씹어 볼 새도 없이 바로 곯아떨어졌다. 잠깐은 즐거웠지만 만족스러운 만남은 아니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첫 번째 만남은 소비가 없었으며, 두 번째 만남은 큰 소비를 했다는 것이다. 관계의 공백을 소비로 메꾸려 해서 그렇다. 행복은 소비의 양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관계에 질을 위해서는 양에 집착해선 안 된다. 사람의 시간은 유한하다. 그렇기에, 어떤 관계도 놓치지 않으려고 하면 오히려 챙겨야 할 자신과 소중한 사람에게 신경 쓸 수 없게 된다. 관계를 정리하고 몸을 가볍게 할 필요가 있다. 나도 최근에 3년 동안 함께 한 댄스팀(나는 중학생 때부터 춤을 춰왔다)을 탈퇴했다. 큰 결심이었다. 그분들은 모두 좋은 사람이었지만, 좋은 사람이란 이유로 다 깊은 관계를 맺으려 한다면, 그것은 내 한계를 과대평가하는 것이 된다. 관계에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팀원 중 나와 깊은 관계의 몇 명은 내가 탈퇴한다고 관계가 끊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과감하게 결정하고 나왔다.
자신만의 시간을 위해서 관계를 거절하는 용기를 내다보면, 자신에 대한 사랑은 더욱 커질 것이다. 내면아이는 성인자아가 자신을 위한다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고, 가슴을 충만하게 해줌으로써 보답한다.
만남 중 가장 중요한 만남은 자신과의 만남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친구는 맞지 않으면 관계를 끊을 수 있지만, 자신과의 관계는 끊을 수 없다. 죽을 때까지 평생 함께할 운명인데 친해져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