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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주훈 Oct 30. 2022

고독으로 만나는 내면아이

내 안의 아이를 만나다

고독의 긍정적 의미를 알고 나니, 더욱 의식적으로 고독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마다 내가 둘로 분리되어 대화하는 느낌을 받았다. 일기를 쓰고 나서 봤을 때도 마치 두 명이 대화하는 것처럼 보였다. 몇 년 전 심리학책에서 봤던 ‘성인자아와 내면아이’ 모델이 계속 연상되었다. 심리 치료를 위해 고안된 방식이지만, 이것이 어쩌면 철학에서 말하는 고독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심리학 박사 마거릿 폴의 저서 <내면아이의 상처 치유하기>에 따르면, 자아를 ‘내면아이’와 ‘성인자아'로 이원화하고 두 자아의 대화를 통해 상처를 치유한다. 내면의 유대를 향상시키기 위한 방법이다. 두 자아를 설명하자면 이렇다.


내면아이는 인격 중에서도 감정적, 창조적, 직감적인 본능이다. 마치 아이처럼 순수하다. 자신의 본래 모습이기도 하며 핵심적인 자아다. 그러므로 약하고 상처받기도 쉽다. 트라우마가 있다면, 내면아이가 가지고 있다. 내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고 있으며, 그러므로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성인자아는 현실적이고 논리적이다. 문화에 의해서 후천적으로 습득한 자아이다. 사회와 맞닿아 있고, 행동에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문화가 우리에게 주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내면아이와의 관계에서는 부모와 같은 역할을 한다. 내면아이를 무시할 수도, 억압할 수도, 사랑해 줄 수도 있다.


철학의 고독과 심리학의 내면아이 이론을 결합할 수 있다는 희미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즈음, 하나의 책을 만나고 확신을 가지게 된다. 20세기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의 저서 <정신의 삶:사유>에 따르면 ‘고독'의 본질은 소크라테스(기원전 5세기) 때부터 ‘하나 속의 둘'이었다는 것이다. 화음을 내려면 적어도 두 개의 음조가 필요한데, 고독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자아로는 화음을 낼 수가 없다. 플라톤은 이를 ‘나와 나 자신 사이의 소리 없는 대화'라고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란 또 하나의 나'라고 말했다.


한나 아렌트는 나에게 두 생각을 연결할 수 있는 다리를 놓아주었다. 기존에 읽었던 고독 관련 사상들, 내면아이 이론,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과 관조 사상, 에리히 프롬의 사랑과 창조성에 관한 생각 등이 마구 뒤섞이고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 사상가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고 느꼈고, 융합을 통해 서로의 빈틈을 메워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는 내면아이가 있다. 고독으로 들어가 내면아이를 마주할 수도 있지만, 방치할 수도 있다. 내면아이는 핵심 자아기 때문에 관심을 받지 못하면 그 본체인 우리가 외로워진다. 그 대신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면 충만한 느낌이 들게 된다. 그것이 바로 자존감이다.


앞서 얘기했던 성과사회와 주의력 산업을 돌아보자. 성과사회에 매몰된 성인자아는 마치 일하느라 자식은 뒷전인 부모와 같다. 도저히 충분함을 모르고 돈을 더 벌기 위해 달린다.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자 한다. 아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더 많은 돈, 더 높은 자리가 아닌 관심이다.

오락에 정신을 빼앗긴 성인자아도 마찬가지다. 자식을 두고 폰만 들여다보는 부모와 같다. 아이가 슬픈 표정으로 관심을 갈구하지만, 폰에 정신을 팔고 아이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보통 지금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두 성격의 부모를 다 지니고 있다. 돈을 위해서 열심히 달리다가 쉴만하면 TV나 스마트폰을 본다. 도대체 고독을 통해 내면아이를 마주할 시간은 언제 생긴단 말인가?


친구가 힘든 시절에 외면한 적이 있다면 사이가 소원해져 다시 마주하길 꺼리듯이, 우리가 내면아이를 대할 때도 그렇다. 한 번 멀어지면 자꾸 피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이나 폰이 없으면 혼자 있길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자신을 마주하기 두려운 것이다. 그러니 시간의 빈틈을 더욱 많은 일과 오락으로 메꾸려 하고 점점 악순환에 빠질 뿐이다. 우리는 고독할 줄 몰라서 외롭다.


그렇게 정신없이 살다가,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명품 가방을 내면아이에게 툭 던진다. 그리고 잠시 가방을 매봐라고 한다. SNS에 사진을 올려야 한다는 게 이유다. 그게 자신에 대한 사랑일까? 우린 내면아이에게 명품 가방을 원하는지 물어본 적이나 있을까? 선물 또한 나를 위한 게 아닌, 주위에 잘 보이고픈, 속은 울고 있지만 겉으로라도 행복하다고 포장하려는 발버둥이 아닐까?


누군가는 내면아이를 마주하지 않고도 많은 월급을 받으며, 겉으로는 남부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돈과 권력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려 들고, 우위를 점하려고 한다. 자신의 권위를 조금이라도 훼손하는 것 같으면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화를 낸다. 자존감이 없기 때문에 물질과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다. 그런 부분을 훼손당한다면 자기 자체가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과사회와 주의력 산업에 대항해야 하는 이유는, 고독을 통해 내면아이와 성인자아가 대화하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그래야만 자신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낼 수 있다. 온갖 유혹과 억압이 활개치는 이 사회에서 고독할 수 없다면, 우리는 진정 나다운 삶을 살아낼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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