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하지 못해서 외롭다
“주닉 주말에 뭐 했어요?”
월요일이면 회사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인사였다.
“혼자 책 읽고 보냈습니다.”
회사에 다닐 땐 주말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주말이 그나마 책을 읽기 가장 좋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혼자 있었다는 답을 하다 보니 부끄러웠다. 나는 서울에 대학은커녕 연고도 없이 일하러 올라와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사람들이 내가 친구가 없어 혼자라고 생각할까 봐 두려웠던 것 같다. 그래서 거짓말한 적도 있고,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내키지 않는 약속에 응하기도 했다. 울산에 있는 부모님과 통화할 때도 주말에 뭐 했냐고 물어보면, 잠시 만났던 약속을 부풀려 말하곤 했다. 사실대로 얘기하면 ‘아이고.. 아들이 만날 사람도 없어서 집에만 있구나’라며 속앓이를 할 것 같았다.
나는 정말 외롭지 않은데, 외로운 감정이 들었다.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외부에서 내 감정이 정의되고 있었다. 혼자 있으면 어딘가 문제 있는 사람이라는 사회적 분위기를 겪고 살아서인 것 같다. 혼자 있음에 행해지는 부정적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 ‘외로움' ‘고독사' ‘고독한 사회’ 우리 단어에는 홀로 있음을 좋게 말하는 뜻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던 나는 두 명의 사상가를 만나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된다.
1년 전 아는 동생 집에 놀러 갔다가. 동생이 <쇼펜하우어 철학적 인생론>이란 책을 내어주었다. 책이 너무 좋아서 자신은 이미 여러 번 읽었다고 했다. 두껍고 어려워 보였지만 운명일까? 그 투박한 책에 마음이 끌렸다. 혹여나 동생의 마음이 바뀔까 고맙다며 덥석 받아왔다. 같은 달에 독서모임에서 읽을 책으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이하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선정되었다. 두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는 몰랐다. ‘고독’을 다루는 곳에서는 빠지지 않는 두 사상가가 동시에 나에게 다가왔다는 것을 말이다.
각 책에서 이상한 구절을 발견했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한다.
“시간을 내어 고독을 가까이하고, 다시 고독을 사랑하게 된 사람은 금광을 얻은 것과 다름없는 이득을 본 셈이다.”
그리고 릴케는 이렇게 말한다.
“반드시 있어야 될 것은 고독 하나뿐이지요. 크고도 내적인 고독 말입니다. 자기 자신 속으로 들어가 몇 시간이고 누구와도 만나지 않을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으잉? ‘고독'이 금광이라니? 반드시 있어야 될 것이 고독 하나뿐이라니?! ‘고독'이란 단어를 부정적으로만 생각했던 나는 고독을 찬양하는 글에서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그러나 차츰 책을 읽어 나갈수록 무슨 말인지 이해하게 됐고, 지금 시대에는 고독이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독(孤獨)’ 이란 ‘외로울 고’에 ‘홀로 독’이다. 고독 단어 자체에 부정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외로움과 고독을 영어로 번역해 보면 외로움(loneliness)과 고독(solitude)으로 나오는데, 둘은 느낌이 다르다. solitude로 다시 검색하면 ‘(특히 즐거운) 고독’으로 나온다. 언어는 그 문화의 정서를 어느 정도 대변한다고 생각하는데, solitude를 표현하려면 앞에 ‘특히 즐거운'이라는 형용사를 붙여야만 하는 현실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그것을 뜻하는 한 단어가 있으면 좋으련만..
그래도 인문학계에서는 ‘고독' 단어의 인식이 다른 것 같다. 번역서가 아닌 한국 저서들에서도 고독을 긍정적인 느낌으로 쓰고 있다. 한양대학교 국어교육과 정재천 교수님은 저서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외로움이란 혼자 있는 고통을 말하고 고독이란 혼자 있는 즐거움을 말합니다. 외로움은 견딜 수 없는, 극복하고 개선해야 할 상태이지만, 고독은 즐길 만한, 누리고 유지해야 할 기회이기도 한 것이죠.”
릴케와 쇼펜하우어가 말한 고독의 의미와 같다. 나도 이 책에서 ‘고독’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할 것이다. 외로운 줄로만 알았던 내게 기댈 수 있는 단어가 생겼다. 난 이제 더 당당히 고독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저 혼자 있는 시간 많은데요? 그럼 고독한 거 아닌가요?”
홀로 있음 자체가 고독한 건 아니다. 홀로 있다는 것은 물리적인 의미일 뿐, 그 외에 어떤 의미도 내포하지 않는다. 홀로 있음이 외로움이 될 수도 있고 고독이 될 수도 있다. 혼자 있을 때 수동적으로 인터넷에만 빠져 시간을 보낸다면, 그것은 고독한 게 아니다. 오히려 외로움에 가까워질 뿐이다.
고독은 내면적인 것이다. 내면적으로 자신과 더불어 있는, 즉 사색에 가까운 의미다. 혼자 있어도 고독할 수 있고, 군중들 사이에서도 고독할 수 있다. 대화 중 깊은 생각에 빠진다면 그것도 고독이다. 좋은 책도 깊은 생각에 빠지게 만들기에 당연히 고독이다.
위대한 사색가는 전쟁통에서도 고독할 줄 안다. 플라톤의 저서 <향연>에서 소크라테스와 함께 전투에 참전했던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가 생각에 잠겨 똑같은 자리에서 하루 종일 서 있다가 다음날 태양이 뜨고 나서야 자리를 떴다고 말한다.
외로움도 동일하다. 혼자 있어야만 외로운 게 아니다. 친구와 있으면서 외로울 수 있으며, 연애하면서도 외로울 수 있다. 외로움은 반대로 내면의 자신과 더불어 있음이 아닌, 내면과 친해지지 못하고 그 의미를 밖에서만 찾으려고 하는 문제로 보인다.
물리적인 홀로 있음이 고독에 유리한 건 부정할 수 없다. 주위에 자극들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시대는 앞에서 말한 ‘주의력 산업'등을 통해 물리적으로 혼자 있어도 고독을 방해받는 게 문제다. 스마트폰과 TV가 없던 시절엔 약속이 없으면, 좋으나 싫으나 자신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온전히 혼자 있을 때가 있는가? 우리의 살갗에는 항상 스마트폰이 붙어 있으니 말이다.
버지니아 대학에서 2014년에 발표한 연구는 현시대의 무서운 점을 보여준다. 다양한 배경과 연령대의 200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스마트폰은 물론 읽거나 쓸거리도 주지 않은 상태에서 혼자 방에 들어가 6~15분 동안 있도록 요청했다. 그중 57%의 참가자는 생각에 빠지기 어렵다고 했다. 또한 89%는 하나의 생각에 빠지지 못하고 여러 생각을 떠돌며 표류했다고 밝혔다. 참가자 절반은 실험 자체가 기분이 나쁘다는 반응을 보였다. 가만히 자신을 마주하게 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더 충격적인 것은 12~18세 남자아이들의 실험 결과다. 15분간의 시간을 참지 못하고 3분의 2가 실험실에 설치된 ‘전기 충격기’의 버튼을 눌러 자신에게 전기 충격을 가했다. 적게는 1회 많게는 190회까지 말이다. 생각만 하는 시간이 너무 혐오스러워서 차라리 감전을 택한 것이다. 참 씁쓸한 결과다. 어린아이들은 아직 자제력이 부족한 시기다. 그런데 생각이 자라나기도 전에 받는 스마트폰, 울기만 하면 앞에 놓이는 아이패드,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혼자만의 생각을 두려워하는 건 당연하다.
1인 가구 비율이 올라가는 이 사회에서 좋으나 싫으나 고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한다. 아니! 고독은 피할 수 있어도 추구해야만 하는 것이다.